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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석 Jul 24. 2022

임진왜란의 승리의 원인 재구성

이순신, 권율과 의병의 역할과 기여

역사학자도 아닌 필자가 왜 이런 글을 써 보는 것일까? 그동안 많은 책과 글을 읽어 보았지만 임진왜란을 왜 승리하게 되었는지 어떤 분들이 핵심적인 기여를 했는지 우리는 지엽적으로만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오랫동안 실록, 각종 책과 자료들을 보고 나서야 임진왜란 승리의 원인이 약간이나마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순신 장군과 핵심적인 기여를 했던 분들을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일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임진왜란의 승리=이순신’이라는 공식을 생각하지만 좀 더 입체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할 듯 하다.


어떤 사안을 입체적으로 보는 노력은 그 성공을 다시 재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상당히 단순하고 즉흥적으로 어떤 사안을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떤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심도 있게 보지 않기 때문에 선거철에 인기투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예를 들어서 임진왜란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순신은 배만 타고 다녔지 결국 싸움은 육군이 한 것 아닌가요?”

“결국 명나라가 와서 된 거지 조선은 싸움이 안 되지 않았나요?”

“의병은 고생만 했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하지 않았나요?”


이런 관점을 약간이나마 입체적인 시각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역사학자의 전문성 보다는 조직의 성공과 실패, 핵심기여자의 성과평가의 관점에서 바라 보려고 한다. 글을 읽다가 보면 400년전의 어벤져스가 조선에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거칠 것 없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수도 한양을 함락시킨다.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대패를 하고, 남도근왕군 5만명이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1,600명 특공대에게 무너지자 조선은 요즘 말로 완전한 멘붕(멘탈붕괴)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처음으로 육군에서 승리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신각申恪 장군이다.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의 방어임무를 맡은 부원수 신각 장군은 적에게 패하여 김명원에게 보고할 겨를도 없이 후퇴, 후방에서 흩어져오는 병사들을 수습하여 다음 싸움에 대비하였다. 신각은 함경병사 이혼의 부대와 양주의 해현(蟹峴)에서 매복하여 적 7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김명원이 신각이 도망하였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조정에서는 신각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뒤에 승전 보고가 들어오자 급하게 사자를 보내 처형을 막았으나 결국 신각은 처형이 되고 말았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계속 밀리던 1592년 5월 7일에 드디어 처음으로 이순신 장군이 옥포해전에서 대규모 전투의 승전보를 울린다. 지기만 하던 조선군이 이겼다는 소식에 조정은 발칵 뒤집힐 정도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승리의 첫 계기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그 며칠 뒤인 5월 24일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정암진 전투에서 일본군 2,000명을 궤멸시키게 된다. 지리적인 이점과 탁월한 전략으로 승리를 했는데 일본군이 밤에 도하를 하려고 표시해 둔 푯말을 늪지대로 바꾸어 놓았고, 늪지대에 빠진 일본군 선봉대를 궤멸시키고 다시 남하하는 본대를 기습으로 궤멸시켰다. 이러한 승전으로 인하여 전국에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핵심기여자가 있는데 그것은 곽재우 장군과 여러 의병장 들의 스승인 남명 조식 선생이다. 당시 퇴계 이황 선생과 라이벌로 인정받는 대학자였다. 이 분의 문하에서 김면, 곽재우, 정인홍 등 50여명에 달하는 의병장이 나왔다. 곽재우 장군은 남명 조식 선생의 손자 사위였다. 남명 조식 선생은 항상 허리에 방울과 칼을 차고 다니며 경敬(정신차림, 깨어있음)과 의義(정의)를 강조하였다. 이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수많은 유학자들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의병의 핵심적인 역할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역할이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적은 한양에서 부산까지 1천리에 달하는 긴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요즘 같이 좋은 길이 없이 대부분 산길이었을 텐데 우마차 같은 것으로 식량, 피복, 무기(총알) 등을 운반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길목을 의병이 게릴라 전법으로 기습하여 보급에 자꾸 차질을 일으키니 적의 전진이 더디게 되었다. 만약 이런 의병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바다에서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쳐들어갔는데 보병들이 휴대용 미사일인 재블린을 들고 중간 중간에 나타나 탱크부대와 보급을 끊어 상대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과 같다.


수많은 의병장 중에 두 분의 의병의 일화가 참 감명이 깊다.


첫 번째가 김면 장군이다. 나이 60세에 의병을 일으켜서 1592년 7월 29일 지례향교 창고에 모여 휴식을 취하는 왜군을 전멸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30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특히 8월 16일에 우척현전투에서 의병장 정인홍과 함께 대승을 거두어 왜군이 전라도 진입을 차단한다. 한 번도 갑옷을 벗지 아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다가 결국 1593년초에 피로누적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숨을 거두기 직전 남긴 말이 유명하다. 필자는 예전에 이 글을 읽다가 눈물이 난 적이 있다. 


다만 나라 있는 줄 알았지만,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네!

(只知有國不知有身)


60세의 노인이 나라를 위해서 한 여름 무더위, 한 겨울 추위에도 그 무거운 갑옷을 벗지 않은 그 정신이 이 나라를 살린 것은 아닐까?


그 다음이 중봉 조헌 장군이다. 조헌 장군은 충의로 똘똘 뭉친 선비로 일본 사신이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비켜달라고 할 때 도끼를 들고 상경하여 일본 사신을 목 벨 것을 청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중봉 조헌과 이순신 장군과의 일화도 흥미롭다. 이순신 장군이 발포만호 시절 이순신 장군을 미워하던 전라좌수사 ‘이용李庸’이 근무평가를 최하위로 하여 파면하기로 관찰사와 합의했으나 전라도사 조헌이 논리적으로 따져서 이순신에 대한 파면을 막는 도움을 주게 되었다. 나라를 구한 사람들 간에는 뭔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대사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는 전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을 당한 후 조헌 장군은 700여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전라도로 진격을 준비하는 왜군과 전투를 벌여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 앞서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아들이 모두 1차 금산전투에서 모두 전사한다.


이를 1, 2차 금산전투라고 하는데 얼마나 처절하고 치열했던지 전투에 이긴 왜군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왜군도 시체를 치우는데 3일이 걸렸다고 하며 결국 왜군이 퇴각을 하게 되고 호남·호서 지방을 지킬 수 있게 되어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뒤에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고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백병전에서 밀리던 우리나라가 백병전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새로운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중봉 조헌은 대학자 율곡 이이, 우계 성혼, 토정 이지함의 제자로 훌륭한 제자를 키워낸 이 분들의 기여도 빼 놓을 수는 없다.


이럴 때쯤에 1592년 7월 8일에 이순신, 이억기, 원균의 삼도수군연합군이 5월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 70여척을 궤멸시킨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이억기 장군은 훗날 칠천량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는데 이순신 장군과 함께 조선수군의 승리의 핵심적인 기여자였다.


또한 충남 금산의 이치에서는 전라도도절제사 권율이 전라도 진출을 위해 전주로 이동하던 왜군을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관군 1,500명으로 무찌르게 되었다. 권율 장군은 준비성이 철저한 장군이었는데 목책과 장애물, 돌과 화살 등을 준비하여 15,000여명의 왜군은 효과적으로 격파하였다. 이 승리로 왜군의 전라도 진출이 좌절된다. 후에 행주대첩에서도 화차(다련장로켓포)를 활용해서 승리한 것을 볼 때 준비성이 철저한 분으로 판단이 된다. 이러한 승전으로 전쟁초반 밀리던 조선은 3개월 만에 무너지지 않을 수준으로 회복된다. 이러한 측면도 알아야 정확한 역사인식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여기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가 임진왜란에서 왜 중요했는지 살펴보자. 이 부분에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조선은 70%가 산악지형이다. 요즘 같은 고속도로가 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군이 북으로 진격을 하기 위한 식량, 의복, 무기 등의 지속적인 보급을 우마차 같은 것에 의지하기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일본 수군이 육군에게 서해 쪽으로 대량으로 보급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것이 이순신 장군에 의해 막혀 버린 것이다.


일본군 대장 고니시 유기나가가 평양성에 당도했을 때, 조선 조정에 “우리 수군 10만이 서해로 돌아올 텐데 조선왕은 어디로 갈 예정이냐?”고 겁을 주었는데 이순신의 승리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영의정 류성룡은 『징비록』에 적고 있다. 이순신, 곽재우, 권율, 조헌 등의 노력으로 곡창지역인 전라도 지역의 왜군 침공을 막을 수 있어서 조선과 명나라의 군대에 군량미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전쟁초반의 승기를 잡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었다.


여기까지 볼 때 어떠한가? 아무 준비가 없던 조선이 이토록 빠르게 전투력을 강화하고 버티고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충의를 숭상하는 선비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에도 볼 수 없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례를 볼 수 있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충무공인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의 역할이 있었다. 김시민 장군은 6, 7월에는 사천, 고성, 진해에 주둔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9월에는 적장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 10월에 2만명의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3,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탁월한 전략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다. 화약, 총통, 비격진천뢰, 지형지물을 잘 활용한 승리였다. 또한 곽재우, 최경회, 정기룡 등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도움도 주었다. 6일간 처절하게 진행된 전투의 마지막 날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에 이마를 맞아 부상을 치료하다가 39세의 나이로 결국 숨을 거두게 되었다. 이렇게 두 충무공이 똑같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일본군은 겨울이 다가오고 보급이 끊기자 초반의 강렬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전쟁은 7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실제로는 초반 7개월 정도에 무너질 수 있었던 조선이 활로를 찾고, 승리의 흐름이 조선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는 부분도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일본이 조선을 괴롭힐 수는 있어도 승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명의 임진왜란 승리의 주역을 찾는다면 바로 영의정 서애 류성룡이다. 동인東人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당론을 주장하여 전쟁준비를 잘하지 못하게 한 잘못도 있으나, 이 분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조판서(요즘의 인사총괄) 역할을 함께 수행할 때,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함께 천거하여 임진왜란을 준비시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쩔 줄 모르던 조정의 다른 신료와 다르게 탁월한 외교력과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명나라 군대와의 조율, 전국의 군량미 배치 등 전반적인 행정을 책임지게 된다.


『징비록』은 그가 쓴 것이어서 객관적일 수는 없으나 책의 내용에서 드러나는 그의 탁월한 식견은 임진왜란 전체를 가장 정확하게 조망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그가 중앙에서 전략적이고 행정적인 지원을 했기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알아본 분들의 역할이 왜 중요했냐 하면 후에 큰 전투들이 있었지만 초반에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 승리의 계기를 마련하고 자신감을 심어준 핵심기여자들이 7년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판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임진왜란의 승리의 원인을 다시 하면 조망해 보면 이순신 장군과 다른 주역들과의 관계, 서로의 기여를 더 자세히 알 수 있고, 이순신 장군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진 : 칠백의총.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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