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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만두 한 주먹 Jul 17. 2022

[21세기 원시인] ep9. 원시인은 주파수를 타고

21세기 원시인들의 삶이 방송을 타고 울려 퍼지다

#intro 조금_남다른_날씨


수도권에서는 최근 한 차례의 장마가 휩쓸고 지나갔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곳 영덕엔 좀처럼 비가 오지 않았다. 날이 가물어 무더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별 수 없이 자각해야 했던 요즘이다. 시골의 경우 도시에 비해 자연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 까닭인지, 무력감이 곧 간절함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더욱이 자주 마주해야 했던 듯도 하다. 태백산맥 오른쪽에 위치한 지역들은 높디높은 산맥과 인근 동해의 영향으로 내륙과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 학창 시절 한국지리 시간에 배운 이론은, 이곳에서 그토록 이색적인 기후를 몸소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이미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아득하기만 한 기억을 보란 듯이 밖으로 꺼내놓는 일 역시 ‘예사롭지 않은’ 날씨의 몫이었다.


#1 지극히_일상적인_휴일



오늘 휴일인데 뭐 해?


모두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휴일. 할 것을 찾자면 뭐든 못할 것이 없는 도시에선 저마다 할 일을 계획하기 바쁘다. 주어진 여유를 단 한 칸만큼도 낭비할 수 없는 까닭일 테다. 그에 비해 할 것도 없어 보이는 영덕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필자의 말이 당최 믿기지 않아서인지, 혹은 할 말이 없으니 구태여 안부라도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도 필자에겐 이런 메시지가 여러 통 도착한다. 사실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앞선 에피소드에서도 몇 번이나 다룬 적이 있다. 대도시로 여행을 간다느니, 나무 밑에서 책을 읽는다느니 하는 등의 그럴듯한 답변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찌 사람이 매번 그럴 수 있겠는가? 보통의 휴일이라면, 필자 또한 그저 에어컨 바람으로 잔뜩 식힌 공기를 방 안에 가득 가둔 채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곤 한다. 꼭 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현재 정착하여 살고 있는 집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 하나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로 부정할 수 없이 ‘21세기 원시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아 왠지 머쓱한 감이 있지만, 사실 조금은 유별난 것도 맞다. 처음 서울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을 당시, 통신비를 조금이나마 절약해 보겠다는 당찬 포부로 셋톱박스를 설치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귀촌한 지금까지도 TV 없이 살고 있지만, 사실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콘텐츠가 있으면 OTT 서비스를 구독해 시청하면 되고, 그보다도 앞서 애초에 미디어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시청할 이유가 없다. TV가 주는 이점이 동시 송출, 즉 생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는 점이라면 적어도 이곳에선 그리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듯하다. 시속 4km/h의 삶에서 방송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 고작 그 정도의 지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남들과 같은 속도로 살지 않을 여유를 누리는 데 관대해졌달까.

그런가 하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니즈를 충족하며 조바심을 최소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더라. TV가 보여 주는 세상이 궁금해 목 빠져라 방송 시간만을 기다릴 거라면 직접 두 발로 걸으며 세상을 마주하는 편이 속 시원하다.



#2 TV_대체재로서의_라디오 


TV를 멀리하면 할수록 라디오라는, 보다 더 고전적인 매체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포기하면 포기하는 대로 또 다른 대체재를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물론 그 대안 모색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그리고 자유 의지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의 이야기다. 주어진 바로 만족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걸로 충분할 터.

필자의 경우 급격히 고도화된 과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며 어렸을 적부터 다양한 매체를 접했던 세대에 속한다. 즉, 부모님 세대들이 흔히들 일컫듯 라디오 특유의 클래식한 감성 속에 자라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남모를 사연을 보내 놓곤 송출되길 바라며 방송시간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주파수를 맞춘다든지,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흘러나오는 POP을 녹음하겠다며 공(空) 카세트테이프를 구매해 생방송 대기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겠다. 감각의 한정이 곧 순수한 두근거림을 낳았던 때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다만, 돌이켜보면 그렇다고 해서 라디오가 필자의 삶에서 멀리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손석희의 시선 집중’은 학창 시절 필자의 기상 알람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주었고, ‘두 시 탈출 컬투쇼’는 5교시 즈음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식곤증을 물리쳐 주었다. 또한 비상식적인 스케줄을 소화해 내야만 했던 도시의 피로 속에 ‘붐붐파워’가 이른 저녁 졸음운전을 막아 줬던 경험, 도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 ‘허지웅 쇼’가 우울증 치료제가 되어 줬던 경험만 보더라도, 필자는 어쩌면 ‘라디오’라는 링거에 의존해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문제에 걸맞은 맞춤형 솔루션을 원한다. 그럴 때면 자신의 안테나로 이리저리 주파수를 찾아, 귀를 쫑긋 세워 보기로 하자. 혹시 누가 알겠는가. 무언가의 불충분을 해결하기 위한 대체재라기엔 과분한, 되려 ‘더 완벽한’ 대안을 찾게 될지. TV 대용으로 청취하기 시작한 라디오를 이제는 그 자체로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고 있는 필자와 같이 말이다.




#3 포항으로의_달콤한_외출(with. 라디오)


라디오는 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만 여겨 왔는데, 답을 ‘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자 불현듯 막연해졌다. 아니, 답을 주어야만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에 사로잡혀 무턱대고 겁부터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왜 하냐고? 차라리 쓸데없는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필자가 기어이 한 명의 패널로서 라디오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무슨 전개냐고?


맞다. 우리 뚜벅이마을이 라디오에 초대받았다.

술자리에서 농담 삼아 꿈을 묻는 이들이 있으면 예능 ‘라디오스타’에 출연하는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던 적은 있지만, 설마 진짜 라디오 녹음 현장에 합류하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알고 보니 평소 뚜벅이마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 포항 KBS 라디오 작가분께서 섭외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주셨다고 한다. 우연히 타이밍이 잘 맞아져 출연을 제의했다기엔 Pd님의 정성과 열심을 다소 가벼이 하는 듯해 덜컥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출연 경위를 생각하면 정말로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우리가 ‘준비된 자’라고 자신할 뻔뻔함이 있다기보다는, 정말로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걷고 있는 이들에겐 굳이 애써 돌파구를 찾지 않아도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뜻이다.

You deserve it.

뚜벅이마을 대표가 아끼는 문장처럼, 우리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 가치를 만들어 낸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자신이었기에.


물론 대도시의 그것에 비해 소박한 규모를 자랑하는 지역 방송국이긴 하지만 그마저도 꼭 우리를 겨냥해 찾아온 기회인 것만 같았다. 지역(로컬)에 정착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살아가는 우리에겐 충분한 기쁨이 되어 주었다. 라디오 출연 하나로 그리도 기쁠 수 있다니, 실은 출세를 꿈꾸고 있었던 것 아니냐고? 그보다도 필자를 기쁘게 한 건 정작 따로 있었다. 포항으로의 외출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필자는 충분히 기뻤다.


포항은 영덕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영해면’의 경우 영덕 북부에 위치해 있어 포항까지는 1시간가량이 소요되나, 영덕 남부와는 생활권을 같이할 정도로 인접해 있다.

수도권을 생활 반경으로 한정한 채 살아가는 이들은 간혹 묻곤 한다.

포항이라니, 그래 봤자 거기도 지방 아니야?

최근 들어 50만 인구선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으나, 포항은 결코 그 정도에 굴할 정도로 작은 곳이 아니다. 지방이란 개념이 서울 및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칭한다고 범위를 한정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포항에는 각종 편의시설을 포함해 영화관, 백화점 등의 문화 여가 시설까지 들어서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로 대도시에 속함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현재 거주 중인 지역 영덕군 영해면의 인프라를 기준 삼아 분류해야 하는 필자의 관점에선, 포항은 대도시가 아니려야 아닐 수 없는 수준이다.


안타깝게도 최근엔 몰려 있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포항에 갈 일을 좀처럼 만들지 못했다. 포항에 간다고 해서 할 일이 분명히 있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외출하곤 했던 지난날이 괜스레 사무치도록, ‘대도시 포항’으로의 외출이 유달리 간절하게 여겨지던 찰나였다. 때마침 포항 KBS 라디오 일정이 잡혔고, 이때다 싶어 포항으로의 외출을 감행한 것이다.



#라디오_녹음에_관하여


뚜벅이마을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홍보 영상에는 간혹 출연한 경험이 있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다. 기껏해야 몇 백 명 단위가 시청하는 유튜브 채널과 실제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라디오는 확연히 다른 까닭이었다. 라디오 녹음 스케줄에 동행한 뚜벅이마을 대표는 산전수전을 겪은 장본인이라 그런지 한껏 여유롭게 녹음에 임했으나, 사석에서나 신나 떠들곤 하던 필자는 긴장한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잡음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녹음실 내 에어컨부터 꺼 버리는 사회자 교수님을 보며 필자의 몸은 더 딱딱하게 굳고 말았고, 그렇게 장장 1시간에 달하는 녹음이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리 준비된 질문’에 ‘미리 준비된 대답’을 하는데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송출된 라디오 방송을 들어 보니 목소리가 떨려 마치 염소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 후로는 조금의 버벅거림을 제외하곤 돌발 질문에도 원활히 대응하며 큰 사고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라디오 녹음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길, 감명 깊게 들었다는 작가님의 평을 듣고서야 비로소 아주 조금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어찌 됐건 2주에 걸쳐 송출된, 인생 첫 라디오 녹음(이자 마지막 라디오 녹음)은 잊지 못할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겨 둘 수 있을 듯하다.



#라디오_그리고_초심(初心)


라디오 녹음이 끝났다. 그리고 필자에게 무엇이 남았냐고?

이번 라디오 방송 출연은 비단 필자뿐만 아니라 우리 뚜벅이마을 전체에게 특별한 경험 그 이상의 무언가를 안겨 주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경상북도라는 로컬에 정착해 산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 버린 까닭에, 처음의 필자가 어떤 마음가짐을 안고 이곳 땅을 밟았는지 점점 망각해 가는 중이었다. 분명 도시에서 느껴 왔던 ‘편리함이란 마약에 취해 나만의 속도를 망각하진 말자고 다짐하며 여기까지 도망 왔는데…… 언젠가부터 그 초심(初心)을 까맣게 잊고 있더라.

편리함을 향한 갈망, 혹은 과속에 대한 욕구가 필자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차오르는 가운데, 이번 라디오 출연을 통해 처음의 마음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뚜벅이마을이 어인 까닭에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여기까지 이끌어 올 수 있었고 또 그 과정 속에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필자가 내린 답이 정답인지 아닌지 지금은 결코 알 수 없겠으나, 적어도 처음 길을 나선 그때를 기억하며 같은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목적지를 잃진 않을 테다.

‘초심(初心), 잃으면 어떤가. 그리고 잊으면 어떤가. 삶이란 게 본래 망각을 전제하고 사는 건데, 그 상실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문제 아닌가’ 하고 묻는 이들도 있을 테다.

다만 필자에게 있어 도시를 벗어나 귀촌을 택했을 당시 가졌던 초심(初心)이란 ‘잃고 싶지 않은 것’ 임과 동시에 ‘잊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결코 망각하고 싶지 않다.

불굴의 집착이 그토록 순수한 간절함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그저 그런 대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시속 4km의 삶을 살아가게 될지, 아직은 무어라 확신할 수 없다. 하나, 4km/h의 속도로 꾸준히 1년을 걸어 보니 끌려가듯 발걸음을 재촉하던 도시의 삶보다 더 많은 길을 걷게 되는 역설을 경험한 이상, 아직은 ‘4km/h로 걷는 삶의 끝’을 고민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지금처럼 걸어가자. 딱 지금처럼만 조금 더 걸어 보자고, 그렇게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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