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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임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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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ma Oct 31. 2024

임산부 배려석, 비워두셨나요?

임산부 배려석

나도 임신하기 전엔 크게 의식하지 못했던 지하철의 현란한 핑크색 자리


임신 전에 나는 생각했다.

'남들 다 하는 임신. 난 임신하면 유난 떨지 말아야지.'

현 임산부로서 말하는데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


임신초기에 나보고 회사에서 "너 주말 근무 괜찮아? 당직 괜찮아?" 했을 때

"네! 그럼요. 제 임신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요."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그 주에 바로 출혈로 병원 가고 유산끼가 있으니 누워있으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바로 택시를 타고 귀가하여 휴직하게 되었다.

당연히 주말근무는 할 수 없었고 수습할 틈도 없이 들어간 휴직으로 인한 공백에 다른 분들이 내 업무를 해줬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아 나는 이제 이전과 다르구나'


임신 전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할 바엔 내가 다하고 말지

남에게 피해를 줄 바에는 혀를 깨물지

이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임신을 한 나는 약자가 되었다.


비어있는 핑크색 자리에 앉는 게 싫었다.

임신은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나와 남편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그 수고로움까지 알아줄 필요가 없다.

배려를 강요하지 말자.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는 멀미가 무척 심해졌고

심지어 지하철을 타도 멀미를 하게 되었다.

가끔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미친 듯이 숨이 차서 헐떡이기도 하고 기절할 거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알았다.

아 핑크색 자리가 이래서 필요한 거구나.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핑크색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내가 겪은 비워두지 않은 사람의 80% 여자였다.

내가 배지를 달고 앞에 서있어도 비켜주지 않았다.

딱 한 번 깁스를 하고 계신 분이 있었고 두 명은 나와 같은 임산부였다.

(당연히 이럴 땐 나도 다른 칸으로 간다.)


그 외에는 참 다양했다.

내가 배지를 달고 헐떡거려도 날 앞에 두고 과일 깎아먹으며 눈길도 주지 않고 깔깔거리던 아줌마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일반석 앉은 청년이 자리를 비켜줬다.

같은 여자인 게 눈물 나게 부끄럽고 청년에게 너무 미안했다.

줄 서있는데 날 새치기 하더니 밀치고 임산부석에 가서 앉던 할머니

심지어 앞에서 내가 서있는데 빈자리 나니까 밀고 들어와 앉는 아줌마

일부러 죽어라 시선도 주지 않고 다리 꼰 채 핸드폰 하던 젊은 여자 등등

그들에게 핑크색이란 그저 여자 좌석일 뿐이었다.

(노약자석처럼 권리로 생각하는 할머니들도 많았다.)

너 배지 뭐? 젊은 여자가 좀 서서 가라

이런 암묵적 느낌을 엄청 많이 느꼈다.


임신 전에 임산부 친구가 지하철 출퇴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했던 적이 있다.

아무도 양보해주지 않아 늘 만석인 지하철에 숨 막혀하다가 내려서 토하고 다시 탔더란다.

내가 "나라면 좀 비켜달라고 말할 거 같은데"라고 했을 때 씁쓸하게 웃던 친구의 기분을 이젠 이해한다.

임산부는 비켜달라고 말하는 게 어렵다.

일단 그 사람이 비켜주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고

역으로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 두렵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결국 입덧으로 퇴사했다.


출퇴근 길 나는 17 정거장의 지하철을 타고 간다.

그래서 매일, 문이 열리는 순간에 두근두근한다.

'오늘은 비어있을까?'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

'배려석'이라는 이유로 인터넷에서 꽤나 논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배려를 의무로 생각하지 말라.

참 무거운 말이다. 내가 아닐 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퇴근길 엄청난 빽빽한 지하철 움직이기도 힘든데

핑크색 자리가 비워져 있을 땐 정말 눈물 나게 고맙다.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양심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하면서 앉는다.

가끔 내가 앉을 수 있는 그 기회는 암묵적으로 비워놔 주는 친절한 사람들의 선의임을 기억한다.


그러니 지하철에 늘 빈 핑크색 자리를 보고 기쁨에 달려가 앉는 비임신한 사람들이라면 (이 글을 보지도 않겠지만) 어떻게 그 자리만 비워져 있었는지 한 번쯤 돌아보면 좋겠다.

당신은 누군가 임산부를 위해 비워둔 선의에 앉아있다는 것을


임산부석에 앉아있다 내리는데 또 아줌마들 소리가 들린다.

"자기야! 여기 자리 났다 빨리 와서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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