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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 May 13. 2016

티티카카 - 바다처럼 넓은, 바다보다 고요한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마을의 티티카카 호수

남미 여행 한 달째. 페루의 쿠스코에서 출발한 버스는 12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볼리비아 국경에 다다랐다. 우리는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즈로 가기 전,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에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에서 하루를 머무르기로 했다.

이름만 들어도 맑고 신비스러운 느낌이 드는 티티카카 호수. 티티카카는 해발 3800m에 위치한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이다. 높기도 높지만 바다처럼 거대한 이 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 두 나라의 국경에 걸쳐져 있어서 양쪽에서 감상할 수 있다. 티티카카 호수가 있는 볼리비아 쪽의 마을은 '코파카바나'이다. 우리가 도착할 즈음 코파카바나 마을엔 비가 막 그친 듯 땅이 젖어있고, 하늘에 뿌연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페루에서 볼리비아로 넘어왔음을 여실히 느낀 것은 바로 숙소를 돌아보면서였다. 페루에서는 꼭 비싸고 좋은 숙소가 아니더라도 와이파이, 핫 샤워(가끔 안 나올 때도 있지만), 아침식사는 기본으로 제공이 되었다. 그런데 국경을 넘어 볼리비아로 넘어오자마자 이 세 가지를 충족시켜주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페루와 볼리비아는 대부분 고산지대라 핫 샤워는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돈을 조금 더 내고 따듯한 샤워만이라도 보장이 되는 곳을 찾기로 해서 묵게 된 숙소는 전망이 좋아 이름이 ‘mirador(전망대)’인 호텔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오랫동안 버스를 타느라 꾀죄죄한 몸을 깨끗이 씻고 나와보니 이게 웬걸! 숙소의 창문 밖으로 흐린 하늘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쨍쨍한 햇빛 아래 호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 풍경을 창문 너머로만 보고 있을 수 없어 서둘러 호숫가로 뛰쳐나갔다.  


호수란 걸 몰랐더라면, 아니 호수임을 분명히 알고 갔음에도 바다라고 착각하게 되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저히 호수라고 생각할 수 없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호수였다. 그리고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난 후, 흐린 구름이 다 걷히고 청명한 파란색의 하늘에 마치 르네상스 명화에 나올 것만 같은 풍성한 구름이 떠 있었다. 그림 같은 구름과 맞닿아 있는 호수의 수평선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반짝반짝 이고 있었다.

물가에는 작은 보트부터 큰 배까지 많은 배들이 정박되어 있었고, 그 옆으론 오리배와 튜브 등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름날 해수욕을 즐기듯 사람들이 나와 수영을 하며 놀고 있었다.  

아름다운 티티카카호수와 아이들
이토록 아름다운 티티카카호수는 천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 그림 같은 풍경을 그저 바라보고 있기엔 아쉬워 일행과 함께 오리배를 타기로 했다.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오리배는 끼익끼익 거리며 호수 위를 천천히 헤엄쳐 나갔다.

이 멋진 호수위에서 오리배를 타고서
천국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저 건너편 그림 같은 구름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결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봐도 현실세계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끼리 "저기까지 가보자! 저기로 날 데려다줘!"라고 소리쳤다.  마치 저 곳으로 계속 페달을 저어 가면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저 곳은 너무 아름다워 도달할 수 없는 곳 같았다. 그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오리배에서의 천국 같은 한 시간, 우리는 햇빛 아래 반짝이는 호수 위에 둥둥 떠서 신선놀음을 즐겼다.




코파카바나 마을에는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티티카카 호수와 마을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고 해서 해가 질 즈음, 노을을 볼 수 있을 시간에 맞춰 전망대에 올랐다. 마을 자체가 고산지대인데다 전망대까지가 은근히 높아 헥헥거리며 올라가야 했다. 언덕을 조금 오르자, 여행객이 많이 찾는 장소라 그런지 요깃거리를 팔러 나온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한참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블록처럼 작아진 코파카바나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수의 그 많던 배들도 여기서는 옹기종기 떠 있는 작은 장난감 같았다.


티티카카 호수는 거대했다. 마치 바다처럼. 하지만 굽이치는 파도가 없는 호수는 고요했다. 이 높은 지대 위에서 어디로 흐를 곳 없이 오랜 시간 고여있었던 호수는 잠에 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호수가 있을 수 있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며 하늘의 색은 달라졌고 호수는 언제나 그랬왔다는 듯 잠잠했다. 사람들도 호수처럼 말없이 그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망대 위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난히 내 시선을 끄는 분이 있었다. 멍하니 호수의 먼 곳을 보고 계시던 한 아저씨는 언뜻 보기에도 여행객은 아닌 것 같은, 이 곳에서 삶을 살아가고 계신 분 같았다. 오랫동안 호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 아저씨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무셨다. 피어나는 담배연기에 담배는 서서히 타들어갔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천천히 내뿜는 연기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저씨는 가끔 이렇게 전망대에 올라와 호수를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에, 아무 말없이 깊숙한 마음속 이야기를 묻는 듯했다. 어쩌면 대답해줄 사람보다 묵묵한 호수가 필요할지 모르는 이야기 말이다. 티티카카 호수는 아저씨의 마음을 말없이 들어주고 있었다.  

한참 동안 티티카카 호수를 바라보다 내려갈때즘, 마을엔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전망대엔 사람들이 기도를 하며 켜놓고 간 촛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사람들의 소망이 담긴 촛불이 마을을 따듯하게 밝히는 것 같았다. 티티카카 호수는 코파카바나라는 작은 마을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긴 곳이었다.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가 잡아온 송어로 음식을 하고, 여행객을 대접하고, 호수를 가로질러 태양의 섬까지 관광객을 실어나르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고된 마음을 묻어두는 곳이었다. 잠시 들린 여행자에게 반짝거리는 천국 같았던 호수가 그들에겐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촛불

다들 한 번씩 마음이 답답할 때 바다를 떠올린 적이 있을 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며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티티카카는 끝없이 넓고, 한없이 묵묵한 바다 이상의 호수였다. 이젠 아마 바다를 떠올리기 전에 바다보다 한없던 티티카카 호수가 먼저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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