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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an 14. 2021

숏컷_1993

레이먼트 카버를 흠모한다면

감독 로버트 알트먼

원작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개봉 1993⠀

배우 릴리 톰린, 톰 웨이츠, 앤디 맥도웰, 앤 아처, 라일 로벳, 줄리안 무어, 크리스 펜, 매들린 스토우, 피터 갤러거


한 줄 정리

'미국의 체호프' 레이먼드 카버를 애정한다면 챙겨봐야 할 영화. 현대 미국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끝간데 없는 냉소로 그려낸다. 당대 최고 인기 배우의 얼굴을 원 없이 구경할 수 있는데다가 그들이 작품 안에 모자이크 조각처럼 조화를 이뤄 장장 3시간 8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아깝지 않다.

주관적 감상

1. <숏컷>은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90년대 대표작이다. 알트먼은 상업주의의 끝인 할리우드에서 느리고 지루한 전개라는 용감무쌍한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오래도록 살아남아 영화를 뽑아낸 감독이다. 이 영화에선 무려 9쌍(부부 8쌍, 모녀 1쌍)의 주요 캐릭터가 등장해 미국 사회 각계각층의 인간군상을 그려낸다. 그들이 각자의 플롯을 따라가며 얽히고설키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아득하다가도 어느새 그들이 거대한 삐에로 인형을 구성하는 눈과 코와 손가락과 정강이뼈와 발톱에 낀 때로서 다 함께 멸망의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영화의 세계관에 유기적으로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 기반한 영화다. 카버는 놀랍도록 정교하고 간결하기 그지없는 단편을 통해 현대 미국인의 불안한 정신세계를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엔 카버의 인물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 헤쳐모였다. ‘카버라면 참을 수 없지!’ 마블 유니버스가 아니라 카버 유니버스랄까나. 제목대로 여러 단편이 숏컷으로 이어 붙여져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형식의 영화다.

수년 전 <대성당>(김연수의 번역!)을 비롯한 단편집을 탐독했던 사실이 무색하게 각 인물이 어떤 단편 출신인지 콕 집어낼 수는 없었다. 다만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은 덕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등장한 부부와 제빵사의 이야기는 명확히 기억났다. 끔찍한 비극 앞에 의외의 위로를 전하는 따뜻한 빵 한 조각(탄수화물 만세!)의 위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먼지 쌓인 소설집을 다시 꺼내 읽으며 인물들의 출처를 달아주고픈 욕구가 강하게 솟았다.


3. PTA(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1999)가 이 영화를 오마주했다고 했다. 워낙 좋아하는 영화라 일찌감치 왓챠에서 별점 5개를 매긴 검증된 명작이다. 아빠와 아들이라 할 만한 두 영화를 비교하는 건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몰입도로만 보면 <매그놀리아>의 압승이다. 캐릭터부터 훨씬 더 피부에 와닿고 그들의 유기성이 대충 봐도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토록 여러 이야기가 중첩돼 있음에도 손에 땀을 쥐고 흥분하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돼 때때로 떠오를 영화는 <숏컷>이다. 이유는 무엇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냉소에 있다. 예술성을 뽐내는 대부분의 영화는 냉소주의를 장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숏컷>의 냉소는 인물들의 온갖 구역질 나는 행태를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는 나머지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영화 내내 인물 중 한 명인 재즈 싱어가 부르는 노래가 깔리는데, 재즈의 문법처럼 혼란스러운 불규칙의 세계 안에 발견되는 어떤 일관성에 어느새 취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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