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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온 Feb 14. 2022

기준 미달의 남자와 연애 중입니다

발렌타인데이를 맞아서






- 스펙이 좋은가? 혹은 내가 존경할 수 있을 만큼의 커리어를 갖고 있는가?

엑스. 그가 가지고 있는 야망의 척도는 제로에 수렴한다. 아내가 돈 벌어다주면 얌전히 살림하는 현모양남(?)이 꿈이다.

- 외모를 가꾸는가? 혹은 180cm 육박하는 키에 운동을 즐기는 사람인가?

엑스. 패션 트렌드나 그루밍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그냥 조끼패딩만 걸치면 된다. 요즘은 아저씨 배를 좀 관리하고 있다. 이 부분은 칭찬해.

- 다이나믹하고 활동적인 취미를 갖고 있는가?

엑스. 그의 취미는 게임이다. 그것도 (요즘 젊은이들은 하지 않는) 와우.



 그야말로 내 기준 미달의 남자다. 누구보다 깐깐했던 20대 초중반의 어린 나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스펙이다. 그런데 나는 현재 그런 사람을 만나고 있다.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우리 엄마는 내가 소위 스펙에 부합하는 잘난 남자애들과의 숱한 이별을 경험해 아파할 때, 나를 보듬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더 따뜻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자나간 망령들(전 남친들을 망령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잔재다.)은 대부분 차가웠다.소위 말하는 스펙이 뛰어난 만큼 성취에 집중했던 그들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니 누군가를 배려하는 태도에 알맹이가 없었다. 겉으로는 따뜻한 말로 나를 대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냉탕이었다. 나와의 인연을 끝내는 것에도 계산된 결과인 마냥 차가웠다. 나는 성취하는 사람이 따뜻하지 않다고 규정지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적어도 내가 만나왔던, 사회적 성공을 꿈꾸고 그것을 해내던 망령들은 그랬다.


 따뜻한 남자란 뭘까. 생각하다가 우리 회사 남성분들을 떠올렸다. 우리 회사 유부남들은 좀 다르긴 하다. 영유아의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이사님은 아내분이 '독박 육아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표현하며, 육아를 돕기 위해 칼퇴한다. 결혼 10년차인데 아직도 아내분 사진을 우리에게 들이민다. 이 때는 꼭 '정말 아름다우시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개발팀장님은 아내의 주문에 맞추어 기꺼이 당근 VIP가 되며, 초등학생 자녀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캠핑을 간다.


 사회에서 만난 선배들은 우리 회사 유부남들과 같은 남자를 만나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 회사 유부남들과 같은 남자라. 큰 욕심 없이 그저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맡은 소임을 다하며, 소중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려나. 그렇게 형체 없는 상대방을 그렸다. 아마 이런 사람을 만나야겠다 다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찰나에 나는 고백 공격을 당했다. 이건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공격이 맞다.


 그는 남사친이라는 타이틀로 6개월에 한 번, 1년에 한 번 안부를 묻던 사람이었다. 이별의 아픔을 서로 위로해주기도 하고, 뭐 하나 해보자며 작당모의도 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너는 남자를 만날 때 나를 먼저 보여줘야 한다'며 스스로를 나의 '친정 아버지'로 자처했던 사람이었다. 내 연애 패턴을 듣던 그가 종종 '야, 너는 나 같은 남자 만나야해.' 라고 말하면 '으.. 너무 싫다.'하며 일축했던 나였다. 어쩌다가 그와 연애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어쩌면 서로 맞을지도 모르겠다며 남몰래 생각한 적이 있다. 그치만 그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를 만나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귀가하려는데, 대뜸 나를 붙잡았다. 그리곤 그는 어떤 예고도 없이 나를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다고 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럴리가 없다. 아니, 아버지가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배신감이 느껴지는데 웃음이 나왔다. 다음 날 진위 여부 파악을 위해 다시 만났다. 오빠는 원래 내 스타일 아닌데. 어어, 익히 알고 있지. 당당한 말투에 그렇지 못해 움츠려지는 그의 어깨에 또 웃었다.







- 정서적으로 안정적인가? 들쭉날쭉한 감정기복으로 나를 힘들게 하진 않는가?

동그라미. 평소 기분이 나쁜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10년간 기분 나빴던 적은 이번에 결혼한 J가 장난 쳤던 3회 밖에 없다고.

- 표현의 결이 나와 비슷한가? 혹은 그의 표현 방식이 오해를 살 여지는 없는가?

동그라미.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비슷하다. 다소 소심해서 공공장소에서는 낯을 심하게 가리지만, 둘 만 있는 공간에서는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는 편이라 편하다. 썸원 어플에 적어놓은 글들을 보면 가끔 놀라곤 한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게 똑같지?

- 평생 나만 볼 것 같은가?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지구력을 갖추었는가?

이것도 왠지 동그라미. 사람이 친해지기까지 진입장벽이 높은데다가 그가 가지는 '의리'와 '책임감' 만큼은 옆에서 보아온 만큼 어느정도 알고 있다. 솔직히 이 부분은 배팅에 가깝긴 한데, 믿어보려 한다.



나는 내 기준 미달의 남자와 만나고 있다. 그런데 제일 따뜻한 남자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니까 따뜻한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을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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