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재미를 영화로 승화시킨
미술평론가 모프는 미술계의 유명인사다. 그의 비평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작품의 성패를 가른다. 그의 지인 로도라는 신인의 작품도 고가에 파는 세일즈 능력이 뛰어난 갤러리 운영자다. 로도라의 비서 조세피나는 모프와 연인 같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조세피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수많은 작품을 발견한다. 사망한 노인의 이름은 베트릴 디즈. 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나이트 크롤러> 댄 길로이 감독과 제이크 질렌할이 다시 만난 <벨벳 버즈소>는 전작처럼 미술계 인간들의 계급 상승 욕구를 다룰 것처럼 보인다.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작품을 둘러싼 미술계 인사들의 관계를 그리면서 동시에 미스터리한 오컬트물의 향취를 슬쩍 껴넣는다.
<벨벳 버즈소>가 용감한 건 양립할 수 없어 뵈는 두 가지 요소, 인간들의 관계를 그린 군상물과 악령이 씌운 듯 서서히 인물들을 잠식시키는 오컬트물을 훌륭하게 결합한다는 점이다. 이런 류의 영화가 현실에서 환상으로 넘어가는 지점을 명확히 정한 후 전진해간다면, <벨벳 버즈소>는 현실에서 환상으로 치고 빠지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모종의 사건들은 어딘가로 이끌리듯 들어가는, 혹은 명백하게 끌려가는 현상으로 그려진다. 이런 묘사는 <벨벳 버즈소>의 환상이 다른 이들의 현실을 침범하지 않되 당사자에겐 명백한 현상으로 다가오게 하고, 이 영화가 완전히 환상인 세계가 아닌 현실적인 관계를 그리겠다는 포부를 천명한다. 실제로도 영화 속 모프와 로도라와 조세피나 등등이 만드는 관계들은 웃기면서도 섬뜩할 만큼 현실적인 권력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벨벳 버즈소>는 오직 인간의 권력욕, 명예욕을 다루는 영화인가? 그렇다기에 디즈와 디즈의 작품이 주는 임팩트가 강력하다. 단순히 ‘무명작가의 작품을 둘러싼 쟁탈전’이라기에 디즈의 작품이 탄생한 경위는 공들여진 느낌이다. 디즈라는 화가의 존재는 <벨벳 버즈소>가 예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근거이지만, 그렇다고 ‘예술은 무엇이다’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디즈의 행적은 언어로만 구현되고, 그 광기는 (더 강력한 방식인) 이미지로 표현되지 않으니까. 그 결과 <벨벳 버즈소>는 관객을 밀어붙이는 고집쟁이가 아닌 상대를 우아하게 농락하는 달변가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 흥미로운 인물은 디즈만이 아니다. 모프는 비평가다. 하지만 <벨벳 버즈소>에서 그가 글을 쓰는 장면은 단 하나다. 디즈에 대한 ‘사실’을 나열하는 장면. 스스로 비평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도 등장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의 글이, 시선이 얼마나 빼어난지조차. <벨벳 버즈소>에선 그의 비평이 아닌 그 대상이 작품만을 볼 수 있다. 누군가에 의해 창작되는 영화에서 비평가를 이런 식으로 묘사하니, 단순히 장면을 뺏다고 생각하긴 힘들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또 누구인가. 돌이켜보면 그 인물은 이 영화에서 가장 동떨어졌다. 그럼에도 <벨벳 버즈소>는 그에게 피날레를 맡긴다. 작중 그의 행적과 마지막 장면을 연결시켜보면 <벨벳 버즈소>가 제시하는 질문이 더 분명해질 것이다.
미술관을 찾아본 이들은 알겠지만, 미술 작품은 가까이 보는 것과 멀리서 보는 것이 분명히 다르다. <벨벳 버즈소>는 미술을 다루는 작품답게 그런 재미가 분명하다. 전혀 다른 톤의 파트가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거듭나는 순간의 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