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운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