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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노 Nov 26. 2023

행복전도사의 자살

행복이란

행복전도사가 자살을 했다. 10년은 족히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행복이라는 단어 앞에 그 뉴스를 떠올린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던 분. 늘 긍정의 말로 밝은 에너지를 주던 장면들.  모든 긍정과 믿음이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한 줄짜리 헤드라인 이상의 자세한 스토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 그 이유가 무엇인들 상관없었을 것이다. ‘행복을 전도한다더니… 본인의 행복은 구할 수 없었던 모양이지.’ 그가 말하던 <행복>에 의문마저 들었다. 나는 그 단어의 진정성 자체를 의심했던 것 같다. 당시 불행한 하루하루에 실컷 지쳐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각박한 마음이 한 사람의 죽음을 그렇게 얼린 칼마냥 날카롭고 무심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그날부터였을까. ‘행복’이라는 단어에는 어쩐지 거부 반응이 올라오는 적이 많았다. 행복 행복 행복 타령을 하면서 오히려 불안을 조장하는 이 세상에 대한 거부 반응일 수도 있겠다.

“뭘 또 그렇게 행복해야 되나요? 그냥 좀 살게요.”


대단한 것을 손에 쥐어야 행복이라고 믿던 때가 있다. 다시 돌아보니, 중요한 일을 따냈던 순간도 행복했지만 상상을 현실로 옮기며 스스로 감동하고 만족했던 마음이야말로 더 귀한 행복감이었다. 30일 중에 27일 정도 야근을 하던 시절엔 매일이 지옥이라 여겼지만, 밤새 일을 하고 얼음 같은 독주를 털어 넣을 때 선명한 행복이 있었고 틈틈이 나누던 동료와의 대화와 끈끈한 전우애도 행복의 조각들이었다.


고단하던 어떤 날들에는 별 일 없이 잠잠히 지나가는 것이 행복이었고, 다사다난하게 분주해야 행복한 날들도 있었다.  그리고는 그저 살아남는 것 만이 행복인 시절도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엄마 얼굴을 마주 보고 안아주며 새 하루를 맞이하던 순간이야말로 잃고 싶지 않은 인생 최대의 행복이라 느꼈었지만, 지나간 장면들을 추억하며 울고 웃을 수 있는 오늘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덜 여문 아기 발가락을 들여다보는 일이나  못난이 강아지가 종종 대는 엉덩이를 보면서도 나는 행복을 느낀다. 문득 발견한 창밖의 초승달이 오늘따라 너무 예뻐서 행복하고, 요가매트 위에서 새로운 자세를 성공해서 행복하고, 운동을 마치고 모든 창문을 열어젖히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청소를 하는 시간도 행복하다. 너무 좋은 노래를 발견했을 때, 붐비는 식당에서 하나 남은 자리를 차지했을 때, 하필이면 그 자리가 구석진 창가자리일 때, 너무 개운한 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혹은 몸이 아주 가벼운 느낌이 드는 가끔의 날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기대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순간을 만났을 때 무척이나 행복하지만, 기대했던 장면과 똑 떨어지게 닮은 순간을 만났을 때도 소름 돋게 행복하다. 어차피 흘러 흘러갈 행복의 기준이라면 이래도 행복하고 저래도 행복한 삶이 어쩌면 이득이 아닌가?


행복이란 용맹하게 얻고자 덤비면 참 어려운 것이지만, 가만히 두고 보면 또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것. 사실은 크고 작은 행복이 사방에 널려있고 그 조각들을 그냥 틈틈이 줍는 것 아닐까. 줍는 사람이 임자, 사실 행복은 어디에나 있다. 되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다.  행복을 줍듯이 가볍게 사는 마음. 원대한 행복을 저 멀리 꿈꾸기보다 내 옆에 가까운 행복을 살펴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  꼭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반대로 생각하는 순간, 자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 작은 긍정이 티끌처럼 차곡차곡 쌓여 태산 같은 꿈을 꿀 수 있게 한다. 그 마음을 딛고, 나라는 인간과 이 삶이 어딘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낙엽같이 가벼운 행복의 조각조각이 탄탄한 거름이 되어 결국 좋은 삶을 향할 힘이 된다고 믿게 된다. 아, 내가 행복을 줍던 이유는, 나아가기 위해서였구나.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여정을 걷고 있으므로.




"행복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당신이 느끼는 대로,
당신이 믿는 대로 일어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 글을 쓰면서 행복전도사의 죽음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날의 죽음 이후 그리고 오늘이 되기까지, 그사이 나는 (아주 다행히도) 누군가의 생을 두고 제 3자는 감히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던 그날의 실망을 이제야 떠나보낸다. 당신의 삶에다 저의 마음을 감히 덧대었던 지난날을 반성합니다.  온 마음을 담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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