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았던 인정
인정(人情)이 없어서 인정도 없었다
하얗고 길쭉한 알약, 파란색의 쪼개진 알약, 분홍색 작은 알약, 캡슐 알약. 현재 내가 먹고 있는 정신과 약물들이다. 이름은 자나, 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외울 게 산더미인 세상에 약 이름까지 굳이 외우고 다니지는 않는다. 의사 선생님이 어련히 좋은 약으로 골라 처방해주셨으려고.
내가 하는 일은 제시간에 꼬박꼬박 약 챙겨 먹고 꾸준히 병원을 다니는 일이다. 효과가 놀랍도록 뿅 하고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정신과 약은 그런 마법의 묘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아질 것을 믿으며 약을 삼킨다. 하루하루, 미약하게나마 달라질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함께 넘긴다.
사실 내가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한 건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나는 한동안 나의 병을 인정하지 못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다. 그 상황에 틱 장애까지 인정해버린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껴질 것 같았다.
언제였더라,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처음 입학해 새로 사귄 친구와 하굣길을 걷는데 증상이 나타났다. 어떤 치료도 하지 않을 때였으니 분명 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때 나를 보던 그 아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신기한 것을 본 표정, 그 이면에 숨은 '나와 다른 것을 볼 때의 옅은 혐오감'. 보이지 않는 인정(人情)에, 나는 나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외톨이가 되었다.
그때 나의 병을 인정하고 일찌감치 치료를 시작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달랐을까. 가끔 하는 생각이지만 모두 쓸모없는 공상이다. 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정신만 과거로 돌아가 봐야 괴로움만 반복하는 짓이다.
습관이라고, 단지 습관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인 지 수년. 나를 지키려 건 최면은 도리어 나를 곪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엉망진창으로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