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자존감을 챙기자
최근 로버트 월딩어 하버드대 의대 교수의 인터뷰에 의하면 인생에 있어 오직 중요한 한 가지는 ‘사람들과의 따뜻하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했다. 수긍은 하지만 타인과 따뜻함을 주고받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을 경험했던 지난 12월은 무거웠다. 쓸쓸한 것은 아니었다. 서글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얼마 전 나는 새 직장을 얻었다. 이 나이에 다시 일을 시작하다니 기적 같았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였다. 적응기간이 난관이었기 때문이다. 젊다면 그 기간이 단축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한 조직의 시스템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출근하던 첫날은 정신이 없었다. 내가 숙지해야 할 일들은 잡다하게 복잡했다. 둘째 날은 전체가 눈에 보였다. 일주일이 지나니 나름대로 익숙해져갔다. 그래도 여전히 깔끔하게 처리가 되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엑셀 프로그램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맡은 일은 엑셀의 초급정도의 지식만 있어도 되는 포지션이었다.
그런데 하루를 마감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업무를 설명하는 그녀는 나의 굼뜸을 못 견뎌했다. 점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무례해졌고 내가 질문을 해도 못들은 척 반응 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를 하는 통에 나는 점차로 주눅이 들었다. 의도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는 업무를 절반만 알려주어서 나로 하여금 실수하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일하려면 심폐소생술 CPR교육 수료증과 결핵검사가 필요했다. 한 달이 거의 지나갈 무렵 차일피일 미룬 결핵검사를 위해 2시간 일찍 퇴근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뜻밖의 사건이 나를 벼르고 있었다.
업무를 마무리하지 않고 일찍 퇴근했다고 그녀가 내게 언성을 높였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음성은 더 높아졌다. 결핵검사는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이미 일찍 퇴근하는 걸로 정식으로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몰아세우는 그녀의 성냄을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날, 한 달 남짓 다녔던 직장을 그만 두고야 말았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전등 불빛은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 나는 내게서 문제점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아침 일찍 6시 45분에 집을 나서야 하는 것도 힘들었노라고. 화장실 가는 틈조차 챙길 수 없는 근무환경이 문제였다고. 우르르 쏟아지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썰미 탓을 하며 스스로 꾸짖고 나무랐지만 마음은 굳은 지방처럼 뻣뻣해지기만 했다.
고민이 깊어졌다. 당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소시오 패스 성향이 짙은 그녀의 성품에 대해 참고 버텨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그녀의 나이가 나보다 20살 아래라는 건 그렇다쳐도 그녀도 입사한지 고작 3개월밖에 안 된 신입이었다니. 내가 결정적으로 그 일을 그만두게 된 건 업무 때문이 아니다.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뿐 아니라 마음까지 일그러졌다.
일을 해야 건강하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만신창이가 된 자존감을 챙기는 게 우선이다. 억울했던 2022년을 말끔히 흘려보내고 새해 다시 행복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