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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Feb 26. 2024

내가 자꾸 설명하고 싶어 한다

꼰대가 되어감을 느낄 때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러 강남에 올라가던 중이었다. 약속 시간 2시간 전에 출발했지만 오늘도 나오자마자 버스 한 대를 놓치자 25분 만에 다음 버스가 왔다. 이대로 가다간 늦을 게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버스가 고속도로를 막 벗어나서 양재에 진입할 즈음 카톡, 이 울렸다. 

"도착! 아무도 없음. ㅋㅋ"

 친구 A다. 늘 약속 시간 최소 30분 전에 나오는 친구. 

"먼저 들어가 있어. ㅋㅋ 엄청난 차량을 뚫고 서울 진입 중." 

내가 이렇게 보내자 친구 B와 C도 각자의 위치를 보내왔다. 그러자 A의 카톡이 다시 한번 울렸다.

"송 맨날 지각~~"


흠. 지각이라 할 말은 없었다. 원래도 지각에 그리 예민한 편은 아니었는 데다, 경기도에 살다 보니 서울 약속은 늘 2시간쯤 잡고 출발해도 주말엔 버스 배차 간격에 따라 30분 정도 차이가 나는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출발해도 좋았겠지만, 늘 여럿이 만나다 보니 둘이 만나서 하나가 일방적으로 기다리는 만남은 아니기에 살짝 방심한 것도 사실. 그렇다 해도 '맨날'이라는 말이 붙자, 마음 어딘가가 조금 긁혔다.


"ㅎㅎㅎ 담엔 전철 타고 올게. 나 근데 맨날 지각했어? 이미지 쇄신 좀 해야겠군."


헐레벌떡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 친구들은 이미 이야기꽃이 한창이다. 자리를 잡고 앉는다. 뭘 타고 왔니,부터 별일은 없었니, 안부인사가 오가는 중. 내가 넌지시 물타기를 한다. 너넨 근데 교통정보 뭐 보고 나와? 난 왜 보고 나온다고 나와도 이렇게 잘 안 맞는지. 우리 동넨 시골이라 버스 한 대 놓치면 30분쯤 기다려야 되잖아. 2시간 전에 출발해도 버스 한 대 놓치면 30분이나 늦으니...


근데, A야, 내가 그렇게 너네 만날 때마다 지각했어? 


그러자 다른 친구들이 그랬나? 하는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는 와중에, 친구 A가 재확인해 준다. 

"너 지난번에 B랑 우리 셋이 만날 때도 늦었고..." 

"하긴, A 네가 워낙 일찍 나오니까 내가 조금만 늦어도 늘 많이 기다리긴 하겠다. 근데 나 너랑 단 둘이 만날 때도 늦었냐?"

"둘이 만날 때는, 그땐 별로 안 늦었던 거 같아."

"그래, 그렇지? 내가 원래 약속 시간에 좀 헐렁하긴 해... 여럿 만날 땐 먼저 온 애들끼리 얘기하고 그러면 되니가 내가 덜 신경 쓰긴 하는 거 같아. 근데 누가 좀 늦게 오면 신경 많이 쓰여? 난 옛날부터 친구랑 만나기로 하고 나갔는데 상대방이 안 나오면 한편으론 좋고 그랬다. 신기하지?"


극 I라서 그런가.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누군가에게 한 번도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한 적이 없다. 그래도 늘 모임이 많았고, 막상 모임에 나가면 누구보다 재밌게 떠들다 들어온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뺏기는 내향인. 만남에 수동적이다. 그러다 보니 이래저래 약속을 잡고 나갔는데 막상 상대방이 제시간에 안 나오면 그때부터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늘 품고 다니는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그대로 안 나와 바람맞기를 기대하다. 그렇게 어느 한가한 카페에 앉아 오롯이 책과 함께 보내는 그 시간이 너무 즐겁다.


신기하지? 얼마 전에는 브라질에서 살던 친척 언니가 오랜만에 귀국해서 어렸을 때 함께 신앙생활하던 동생들이랑 같이 만났거든. 총 5명이 만나기로 하고 한정식집을 예약했어. 1명 빼고는 모두 30분 전에 도착해서는 예약한 자리가 날 때까지 한정식집 앞에서 수다를 떨며 기다렸지. 근데 약속 시간까지 동생 A가 나타나지도 않고, 계속 카톡도 전화도 안 받는 거야. 좀 기다리다가 어쩔 수 없이 5명이 들어가는 큰방에 들어가 우리끼리 주문을 하고 기다렸지. 근데 밥을 다 먹고 차 마시러 자리를 옮길 때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처음엔 약속 시간을 잊었나? 아님 차가 밀리나? 했는데, 우리가 만난 지 2시간쯤 지나자 당연히 사고가 난 건 아닌지 걱정했어.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동생 B가 우리한테 이러는 거야. 


"걱정하지 마요. 그 언니 그냥 깜빡했을 거야. 우리 지난번 만날 때도 한참 늦게 왔잖아. 약속 잘 잊어버리기도 하고. 좀 있으면 연락 올 거예요." 


정말 밥을 다 먹고 다시 30분쯤 수다를 떨고 자리를 이동하려고 할 때쯤 연락이 온 거야. 다른 모임이 늦게 끝나서 이제야 출발한다고. 가서 먼저 차 마시고 있으라고. 근데 신기한 건 우리가 몇 년 동안 간간히 만나는 동안에도 우리 중 다른 사람은 동생 A가 늘 늦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모임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도 없다는 거지. 


나는 어떤 모임에서 누가 안 나온다고 허전한 적도, 늘 누가 늦어도 그게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사람이더라고. 늘 사람을 만나면 즐겁고, 헤어지는 시간은 아쉽고! 먼저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아니어도, 일단 만나면 그 시간은 다른 것과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마음을 꽉 채웠던 거 같아. 


그러니까 함께 한 그 시간 동안 충만했으면 됐지. 

여럿이 만나는 모임에서 누구 하나쯤 조금 늦은들 그게 뭐 대수냐,는 거다. 




그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홀로 고요해지자, 그날 친구들과 나눈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유독 이 말이 마음을 건드렸다. 친구가 그냥 무심코 한말, 그냥 넘어가도 될 그 말을 붙들고 나는 현란하게 나를 변명하고 있었다. 충분히 아무 의도를 담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말들이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내가 자꾸 뭔가를 설명하고 싶어 했다. 어쩌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이순(耳順)이 되려면 아직 10년이나 남았는데... 이렇게라면 자못 피곤하게 살 것 같은 예감이 든다내가 점점 꼰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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