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학원 알바를 그만두며 결심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옷을 사지 말 것. 두 번째, 돌봄의 일이 내게 오면 기꺼이 감당할 것. 나이 오십에 경제적 부담을 함께 지지 않겠다고 하면서 해오던 방식 중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 무책임한 어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두 벌의 옷은 사 입는 사람이었다. 명품을 입는 것도 아닌데, 여자로 태어나서 계절에 몇만 원짜리 옷 한두 벌쯤도 못 사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산 옷 중 몇 벌은 반품도 뭣도 못한 채 옷걸이에 그대로 걸어 놓으면서도. 비싼 건 아니니 괜찮아, 이 정도 기분쯤은 내며 살아야지, 하며 합리화하고 살았다. 옷을 사지 않겠다는 동기는 간단했다. 어느 날 TV에서 우연히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을 보았다. 그곳엔 드넓은 모래 언덕 대신 전 세계에서 몰려온 헌 옷가지가 쓰레기 산을 이루고 있었다. 소가 풀 대신 옷을 질겅질겅 씹어먹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곧장 방으로 달려가 옷장 문을 열어 본다, 옷장을 꽉 채운 똑같은 컬러에 죄다 비슷한 디자인의 옷들, 이중 몇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몇 벌이나 될까, 옷을 씹어먹던 소처럼 저 아래부터 구역질이 밀려든다... 이런 순수한 동기로 움직였다면 오죽 좋겠냐마는. 나의 동기는 단순했다. 경제적인 이유. 그저 줄어든 내 수입 규모 안에서 지출을 좀 맞춰 보자는, 순전히 경제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전업주부로 산지 10년이 넘었건만 부끄럽게도 나는 지금까지 장을 볼 때 한 번도 가격 비교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나 같은 헐렁이는 아무리 기를 쓰고 가격을 비교해 봐야 상인의 요령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것. 내 아무리 할인율, 쿠폰, 무료배송, 카드 할인 따위를 비장하게 이마에 새기고 검색을 시작해도 어차피 업자들이 자기들만 아는 방식으로 상품을 배열하고 정가와 단가와 할인율과 에.. 또 내가 모르는 기타 등등으로 숫자를 둔갑시키면 결국 나는 똑같이 당하고 말거라는 이상한 심증. 그도 아니면, 초반엔 눈에 불을 켜고 콩나물이나 두부에서 몇백 원을 세이브한 내가 막판엔 나도 모르게 클릭하고 들어간 이벤트 창에서 즐겨 먹지도 않는 고급버터나 올리브나 아보카도 따위를 담아 결국 '똔똔'이 되게 만들 거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거지. 알뜰주부가 되려면 뼛속부터 경제적 관념이 온몸에 배어 있어서 콩나물에서 아보카도까지를 에누리 없이 아껴야 하는데, 나같이 포시라 빠진 인간은 결국 흉내나 내고 말 거라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었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합리화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안 그래도 이웃과 비교하고 살며 불행할 일도 많은데, 콩나물 가격까지 비교하고 살면 너무 비참해지지 않겠나, 하고.
나 같은 인간이 얼마나 쓸데없이 생각만 많고 결심에 무력한 인간인지 잘 아시겠지.
그러니, 1년 동안의 옷 사지 않기 셀프 챌린지를 시작한 결심이 중국 대장정과 고난의 행군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나에겐 비장한 것이었다는 걸 언급해두고 싶다. 고백하자면, 여름에 원피스 딱 한 벌을 샀다. 그 옷을 사고 바로 후회하고, 그 옷을 가장 잘 보이는 데 걸어놓았다. 습관적으로 쇼핑몰을 기웃거릴 때마다 그 옷을 쳐다보고는 화면을 닫았다.
1년 동안 나름 옷을 사지 않으며 깨달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역시 나란 인간의 하찮음에 대해서다.
독서모임 친구들에 의하면, 내가 기후위기 운운하며 '디스토피아녀'가 된 것이 만 3년이 넘었다고 한다. 뼛속까지 불안하고 염세적인 인간인지라, 지난 3년간 무슨 책을 읽어도 모든 결론이 지구종말로 마무리되었다. 근거는 명확했다. 기본적으로 지구상엔 이미 인구가 너무 많은데,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은 결코 환경을 위해 자신들의 경제논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개인 또한 편의에 너무 길들어 있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환경을 생각하진 않을 거라는 것. 그러니까, 인간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담 스미스식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경제적 동기로 움직인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이유는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고기와 빵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는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기후위기에 대해 나는 어정쩡했다. 되도록 가까운 곳은 걸어 다니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집이 2층이라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고, 텀블러를 가지고 다녔고, 집에서 물티슈를 끊어본 정도. 별로 불편하지 않게 바꿀 수 있는, 대부분 쉬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환경을 생각해 배달음식을 덜 사 먹거나 동네 마트에서 장보기를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환경 보호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그만큼 불편한 것들은 별로 고려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리고 합리화했다. 무조건 소비를 줄이는 방식은 오히려 생산과 소비라는 경제의 선순환을 거스르는 방식이라고. 많은 것이 자동화되는 미래에는 생산과 소비를 맞추기 위해서 노는 사람에게도 돈을 줘가며 소비를 일으켜야 한다지 않나. 너무 극단적인 방식은 금물!
그 생각이 살짝 바뀐 건, 알쓸신잡에 나온 김상욱 박사의 논리에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특단의 어떤 대책이나 기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 자체를 적게 쓰는 것이다... 에너지 문제의 핵심은 어떤 에너지든 사용하면 이것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쁜 에너지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다. 탄소를 배출하고 지구 온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우린 지금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다. 모든 게 방만하고 넘쳐난다. 그러니 어느 것 할 것 없이, 그럴듯하게 포장도 말고, 절대적으로 삶의 규모 자체를 줄여야 한다! 내겐 그 논리가 어떤 우주 공식보다 단순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불편을 감수하진 않았다. 옷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소도, 사랑하는 김상욱 박사의 논리도 그저 반짝, 스쳐 지나가는 구호일 뿐이었다. 1년 전 내가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환경에 대한 애정 같은 기특한 이유 따위 없었다. 경기불황과 쪼그라든 가계부 때문이었다. 알바를 그만둔 데다 불황의 전운이 가득했다. 게다가 최악의 정부가 들어섰다. 의식주란 이유만으로 이전처럼 계산 없이 카드를 긁어대다가는 조만간 가계 경제가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이 뻔히 보였다. 예전처럼 먹고 살만 했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불편함 혹은 불쾌감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환경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생활고라는 선택압이 작용했고, 그 뒤에야 환경 보호라는 그럴듯한 구실이 따라붙었다.
"마지막 나무 한 그루, 마지막 물고기까지 씨를 말리고 나서야 당신은 돈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한동안 환경 문제에 꽂혀 있을 때 가슴에 담은 구절이다. 어느 인디언의 경구라는데, 나는 아직까지 이것만큼 자본주의의 풍요에 도취된 우리에게 딱 맞는 경고를 보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돈이 없어지니 그제야 조금의 불편과 변화를 감수해 보겠다고 결심이라도 하는 꼭 나 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1년 동안 알바를 하지 않으며 깨달은 게 또 하나 있다. 그전까지 한달에 딱 100만원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랬건만. 그깟 100만 원! 있으나 없으나 먹고사는 데엔 별 지장이 없었다. 한 달에 100만 원. 일 년이면 1200만 원이다. 물론 아들이 대학에 가는 대신 알바를 하며 자기 용돈을 벌어 쓴 것이 제일 컸겠지만, 그동안 매달 통장에 꽂히던 100만 원 없이도 지금까지 특별한 빚 없이 잘 살고 있다. 옷을 사지 않고, 미장원을 줄이고, 배달 음식을 덜 먹고, 장을 볼 때 한번 더 생각하는 조금의 변화. 그런 마음이 아마도 다른 씀씀이까지 좀 더 깐깐하게 했던 것 같다.
기후위기를 경고하는, 한번 도달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변곡점이 고작 몇 년 앞으로 다가왔다. 올여름 우리는 극단적 기후변화의 징조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기후변화와 지속 가능한 삶. 나는 의지가 약해 책을 읽어도 곧바로 잘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불의를 보고도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대신 싸워주는 대의 따위도 없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그동안 읽은 책들이 내게 삶의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필요로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었다. 조금은 어른스럽고 싶다는 양심의 목소리, 그리고 남편에게 받아쓰는 빠듯한 생활비도 나에게 적잖은 선택압으로 작용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결코 바꾸지 못할 것 같았던 삶의 불편함을 감수하게 했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1년 동안 욕구불만과 우울을 달래 가며 옷 안 사기 셀프 챌린지를 실천한 나 자신을 조금 칭찬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매해 계절마다 사대는 그깟 옷 몇 벌 없어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최근엔 이런 약간 기발한(?) 생각도 들었다. 내친김에 한 달 동안 교회에 똑같은 옷 입고 가기 챌린지 같은 것도 한번 해볼까? 검소한 퀘이커 교도처럼, 주일에만 입는 정장 한 벌을 정갈하게 세탁해 놓고, 매번 그 옷만 입고 교회에 가는 거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침마다 옷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고 예배에만 집중할 수도 있으니 나에겐 나름 의미 있는 챌린지가 될 것 같다.
의지박약에 우울과 염세일색의 인간에게 챌린지라니! 시간은 화살처럼 내내 나를 떠나 달아나기만 하는 것 같더니, 1년 사이 내게 변화라는 것이 있었구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