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광주가 아니라 부산이었대도?
12.3 내란이 있기 두 달 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있었다. 솔직히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한강 작가는 한국인에게 그리 인기 있는 작가가 아니었다. 2016년 그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세계적인 맨부커상을 수상했지만, 책 좀 읽는다는 독서인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책은 좀 불편한 책이었다. 훌륭한 건 알겠어. 하지만 그렇게까지 속속들이 인간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방식에 독자들을 질리게 한달까. 그러니까 <채식주의자>를 쓴 한강 작가는 내게 여성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문체와 병적이리만큼 노골적인 장면들 때문에 내겐 선뜻 추천되지 못하는 작품 목록을 가진 작가였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었다. <채식주의자가> 가부장이라는 개인적인 폭력의 양상을 다루고 있다면,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전면에 두고 국가 폭력이 개인에게 드리운 상처와 아픔을 여러 각도에서 다룬 작품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시간과 공간적 배경은 1980년 광주, 전남 도청. 친구 정대를 찾기 위해 상무대에 들어왔다가 시신 수습하는 일을 돕게 되는 15세 소년 동호를 기점으로 그날 전남 도청을 지키다가 희생된 이들과,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그날의 기억에서 한시도 자유하지 못한 이들의 증언이 이어진다. 소년은 도청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무고한 주검을 수습하며 죽음의 이유를 묻고, 죽은 소년의 혼령은 자신의 몸이 다른 주검과 겹겹이 포개져 악취를 풍기다 마른 덤불과 함께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지켜본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선처란 없었다. 그들은 투항한 후에 다짜고짜 조사실에 끌려가 뺨을 맞고 뼈가 드러날 때까지 고문을 당하고 누군가의 거처를 추궁당한다.
그날 밤 그저 광주 병원 옆을 지나다 운명처럼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키게 된 한 여자는 보안부대로 끌려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여공이었고 잠시 노조에 몸 담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녀는 취조실에서 북의 지령을 받고 잠입한 간첩으로 둔갑했다. 그들은 날마다 그녀를 조사실 탁자에 눕혀놓고 추궁했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고,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에서 그녀가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 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국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 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167
그녀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 대신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야학에서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고귀하고, 우리에겐 정당한 처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배웠다. 그녀는 배운대로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위해 노조활동에 몸담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를 빨강이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증언해 달라는 역사적 책무 앞에 서 있다. 1980년 그날. 학살과 고문과 방관 혹은 가해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러 인물들의 트라우마를 작가는 그렇게 체휼 하듯 소설 안에 생생하게 되살려 내고 있었다.
지난 명절. 어머니와 만나 오랜만에 정치 얘기를 나눴다.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달리 한국 정치에 애국충정한 우리 시대 보수의 대표 격이라 할 만한 어른이시다. 오랜 세월 나는 그녀로부터 한국 정치를 걱정하고 토로하는 마음을 들어왔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는 누구보다 진심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와는 전혀 담을 쌓고 살고 있던 나는 명절마다 늘 역사와 전통이 배어 있는 그녀의 해박한 지식 앞에 그저 묵묵히 우리나라 한국 보수의 진면목을 경청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날도 나는 어머니 앞에서 어쭙잖은 지식을 가지고 새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해 썰을 푸는 중이었던 듯하다.
검찰이 몇 년 동안 그렇게 이 잡듯 추궁했는데도 지금 어떤 것 하나 위법한 것을 찾아내지 못했잖아요. 어머니, 없는 죄도 사돈에 팔촌 거치면 만들어낸다는 검찰인데, 이 정도면 우리가 그동안 가짜뉴스에 얼마나 가스라이팅 당한 건지 인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말에 호락호락 넘어갈 어머니가 아니셨다. 그쪽 진영의 논리는 당연히 내 쪽 보다 탄탄했다. 다소 톤이 높아진 정치 토론에 남편이 시끄럽다며 끼어드는 바람에 어머니의 변을 자세히 들어보진 못했지만, 더 길게 얘기했어도 그날 우리의 결론은 똑같았을 것이다.
10여 년 전. 수학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나간 학생 250명을 포함한 총 304명의 세월호 탑승자가 제주도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어머니와 나는 처음 몇 달 동안은 그 꽃 같은 죽음들 앞에 함께 애도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무능과 정관계 배배 꼬인 이해관계, 부정과 비리의 적폐가 드러나자 점점 우리의 피로도는 높아졌고 의견도 갈리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화물을 더 많이 싣기 위해 평형수를 비웠고, 제대로 포박되지 않은 컨테이너를 쌓아 올렸다. 무분별한 개축과 증축이 이어졌고, 안전과 관리를 맡은 이들은 이를 적발하는 대신 탐욕에 눈멀어 서로의 비리를 눈감아 주었다. '발전과 번영은 종교가 되었고 배가 왜 이렇게 기울었지?' 하고 의혹을 제기하면 종북이란 이름으로 추궁당했다. '당연히 문제가 많았으나 근본적인 수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땜빵과 땜빵과 땜빵과 땜빵... 그리고 어느 날 마치 이 배를 닮은 한 척의 배가 침몰했다. 기울어가는 그 배에서 심지어 아이들은 이런 말을 했다. 내 구명조끼 입어...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도 기울기를 포기할 수 없는 기울어진 배에서... 그랬다. 나는 그 말이 숨져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의 문제도 아니고 경제의 문제도 아니다. 한 배에 오른 우리 모두의 역사적 문제이지만 진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눈먼 자들의 국가> p. 63~64.
어머니, 그러니까 이게 모두 우리 어른들이 만든 적폐거든요.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오로지 돈돈, 하다 보니 서로 눈감아 주다가 오랫동안 쌓인 적폐요. 이 참에 제대로 발본색원해서 근본부터 파헤쳐야 해요.
내가 어디서 들은 어줍잖은 이야기들을 짜맞춰 흥분하며 말했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다 파헤치다 보면 나라의 근간이 무너진대이”.
너무 오래 되어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런 논리였을 것이다. 정경유착 한다고 대기업을 때리면 대기업을 피라미드 꼭대기로 한 그 아래 하청업체들까지 다 도산된다는. 그건 평소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는 어머니의 지지와도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평생 경상도를 벗어나 본 적 없이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살아온 어머니. 수구 보수 세력이 추앙하는 이승만 대통령 임기 8년,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무려 18년 동안 독재를 하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들의 통치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저 정치적 기반이라곤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 외에 아무런 능력도 증명해 본 적 없는 박근혜를 아무런 의심없이 대통령으로 뽑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300여 명의 꽃다운 죽음 앞에서도 어머니가 끝내 박근혜의 파면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를. 돌아보면 어머니는 평생 한 번도 희생자 쪽에 휘말려 들어가 본 역사가 없었다.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 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배기를 타고 내려와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고,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 p. 24-25
1980년 그 일이 광주가 아닌 대구나 부산에서 일어났더라면. 아니면 다른 어느 도시에서든. 광주 아닌 다른 곳 어디라도. 한번도 희생자 편에 연루되어 본 적 없는 도시에서. 어느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옆구리에 성경과 찬송가를 끼고 교회를 향해 걸어가던 젊은 부부와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나선 우리 앞에. 그 일이 벌어졌더라면.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5.18 언저리만 되면 한두 집 너머에서 곡소리가 나는 그런 도시에서 희생자의 가족의 지인의 지인으로 살았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지난 12.3 계엄을 스포츠 관람하듯 그렇게 절대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