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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Sep 14. 2020

상환 못한 이해유지비의 이자

이해를 고민함은 끝없다. 이해에 다가가는 과정은 내 기준, 이해라는 결과는 내 판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온전히 당사자가 되어야 이해인 것이다. 나는 반려자에게 '살면서 당신을 이해하겠다'라며 하객 앞에서 공표했다. 사랑은 추상적 감성이다. 이에 비교하면 이해는 태도가 포함된 사랑이다. 태도는 구체적 행동이므로 추상적 감정에 비해 다루기와 지속이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순간의 감정보다는, 지속의 괴로움을 더 높이 산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무게있는 이해를 선택했다.


사실 정확히 일 년 전 오늘을 생각했다. 그때부터 이해에 강박이 생긴 것 같다. 상대의 입장은 어떤가. 그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왜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에 대해 고민하고 의심하고를 되풀이했다.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스스로를 아직도 사회화가 되지 못한 동물로 여기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그동안 이해라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포용인지, 낮추어 본건지. 높여 본건지, 무시한 건지, 일단 넘긴건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척했던 것인지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지금 보니 '파악할 수 없었다'가 맞다.




유지비가 전혀 들지 않은 이해는 짧은 무료체험에 가까웠다. 좋은 이해를 하자고 다짐하고 살아온 시간 동안,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상대에게 어느 순간 서운함이 들었을 때 느꼈다. 역시 나라는 사람은 간사했으며. 감정은 길지 않고. 유지보수관리비가 끝없이 꾸준히 들어가는 '행동의 지속'이란 녀석은 저축한 감성과 각오를 곧 소진하니, '어 그래라' 리볼빙을 써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무엇보다 내 고집하나 꺾고 버리는 게 그렇게나 힘들고 어렵고 별스러운 일이냐는 것이다. 왜 내 고집은 관철도 이해도 쉬운데, 상대의 의견을 고집이라 오해하는 자신이 너무도 못나 보였다. 노력한다고 했는데 결실이 없었다. 당연히 상대 또한 날 이해하느라 비용을 지불하는데, 지불의 행동이 아니라 비용을 본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다. 일 년이 되는 이 날에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유지비 산정 기준을 내가 바꾼 것 같다. 유지비의 산정 기준은 상대방이지 내 자신이 아니다. 상대를 독립적 존재로 인지해야만 한다. 나를 기준으로 유지비를 산정한 것은 상대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나처럼 된 상대를 기준으로 유지비를 산정했으면서, 상대를 기준으로 유지비를 책정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행동이나 의견이 예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마다 유지비는 발생한 것이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자매도 다른데,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값이 솟구쳤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화하여 사고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게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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