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rliver Jan 21. 2017

달팽이 이름 같은 '므앙응오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의 숨결

한 여름의 강가의 방갈로는 시원한 숙소겠지만 1월인 지금은 물가의 한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추운 밤을 선사했다. 그동안 나는 준비해온 오리털 침낭에서 자고, 침낭이 없는 동행에게는 내 이불을 주었다. 전에는 침낭만으로도 따뜻하게 잘 잤는데 어젯밤은 그렇지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한기가 방갈로의 널빤지 사이로 올라와 침낭 속까지 파고든 것이다. 이불을 두 겹 덮고 잔 동행도 마찬가지로 추위에 떨며 잤다고 한다. 동남아시아라고 얕봤던 라오스 산골의 겨울밤의 추위는 생각보다 맵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는 축축한 농키아우의 아침,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발코니로 나가본다. 어젯밤 여기 머문다고 한 미국인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기저귀를 찬 아기도 지난밤을 견뎠을 것이다. 이곳 농키아우도 소박한 마을이다. 신선하고 쌉쌀한 공기는 폐로 들어와 온몸을 휘감는다. 옷가게에서 양말을 사고 ATM도 찾는다. 현금이 수중에 들어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신을 벗고 들어가는 라오스식 식당 한 구석에서는 장작을 태우는 난로가 화력을 뽐낸다. 이글거리는 나무난로 옆에서 푸석한 얼굴로 먹는 뜨끈한 포리지는 추위에 오그라들던 속을 풀어준다. 샌드위치까지 더 먹고서야 배가 찬다. 손님도 별로 없는 아침, 포만감에 절은 얼굴로 카운터에 서니, 카운터 앞의 주인이 배 많이 고팠나 보라며 껄껄 웃는다. 그제야 좀 많이 먹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배가 고팠던 건지, 따뜻함이 고팠던 건지 모르겠지만  들어설 때보다 가벼운 기분임은 확실하다.

선착장에 들러 11시 출발이라는 배 시간을 알아두고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 나온다. 므앙응오이로 가기 위해서다. 길고 좁다란 작은 배들이 얼기설기 사람들을 기다리고 사람들은 짐을 들고 승선 시각을 기다린다. 아침의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오늘도 뜨거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므앙응오이는 2014년에야 전기가 들어왔다는 라오스의 산골마을이다. 섬은 아닌데도 도로로는 연결되지 못하고 오로지 배로만 들어갈 수 있는 오지마을이 배낭여행자들의 입소문으로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승선을 기다리다 보니 어제 빡몽까지 같은 버스를 타고 와서 농키아우 들어오는 밴도 함께 타고 온 이스라엘 청년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기다란 배는 양쪽 좌석에 두 사람이 앉고 그 사이에 한 사람이 더 앉아 세 사람씩 줄을 맞춰서 앉는다. 그나마 뒤로 밀려난 우리는 좌석이 아니라 널빤지 위에 엉덩이만 걸치고 이스라엘 청년 한 명과 끼어 앉는다.

농키아우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므앙응오이를 향해 모터를 돌린다. 흙색 강물과 안개가 걷히고 있는 파란 하늘, 카르스트 지형의 높은 산이 특색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낸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배는 흰 포말을 일으킨다. 앞뒤로 보이는 중첩된 산들과 강물이 눈앞에서 출렁이는 모습이 수묵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우뚝 솟은 높은 산 아래 물길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와 멀어졌다가도 손에 닿을 듯 다가오는 모래톱들이 조용하기만 한 아침을 즐기게 한다. 작은 배가 유람선이나 되는 듯 사람들도 말없이 풍경을 감상한다. 가본 적도 없는 하롱베이나 장가계를 괜히 폄하(?)하며 경치를 바라본다. 오지 마을로 들어가는 기분을 묘하게 즐기고 있다.

배가 므앙응오이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사람 좋게 생긴 할아버지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기로 한다. 선착장에서 가장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다. 우강이 바라보이는 발코니 앞에는 해먹이 달려 있고 새것이나 다름없는 침대가 두 개 들어간 목욕탕 딸린 독채가 70000낍이니 우리 돈으로는 채 만원이 되지 않는 금액이다.

므앙응오이로 오기 위해 전날 여덟 시간의 이동을 하고 싼 방갈로에서 강물의 한기에 오들오들 떨며 새우잠을 자고 아침에 배를 탔다. 숙소까지 정하고 천천히 짐을 풀고 씻고 나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걱정이 된다. 어렵사리 도착했지만 막상 므앙응오이에서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할 일 없음을 즐기러 오는 곳.


선착장 바로 앞의 숙소에서 나와 좁은 마을 길을 따라 산책을 한다. 선착장 근처는 그나마 게스트하우스나 식당이 있지만 강에서 멀어질수록 이곳은 그저 오지마을일 뿐이다. 인적 없는 한낮의 고요한 마을에는 닭과 오리, 개와 송아지, 돼지가 버젓이 거리를 활보한다.   

빨간 문이 인상적인 사원을 기웃거려 본다. 계단 난간에는 장승과 비슷한  머리 세 개가 달린 용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아까 우리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여행자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큰 스님들은 보이지 않고 마당에 나와 있던 어린 스님들이 이방인들은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 할 일만 한다. 고요한 경내에서 더 소박한 법당을 돌아보고 나온다. 절대 바쁠 것 없고 할 일도 없는 발걸음은 고요한 풍경만큼이나 느려진다.    

빨랫줄을 네트 삼아 공놀이 하거나 신발 던지기를 하며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햇살 따가운 오후다. 직접 머플러를 짜고 있는 어린 엄마와 그녀의 아기가 손을 흔든다. 핸드메이드 머플러가 뜨거운 햇살에 빛이 바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지만 아이 엄마는 열심히 손을 놀려 옷감 짜는 베틀을 돌리는 중이다. 고요한 오후의 소소한 풍경들은 빛바랜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높이의 큰 산들이 멀리 우뚝우뚝 솟아있고 강가에 연한 한적하고 소박한 마을에서의 시간은 달팽이 걸음처럼 느리게 흐르고 있다. 강가 옆에는 게스트하우스나 식당이 몇 채 있지만 골목을 따라 잠깐 들어왔을 뿐인데 흙먼지를 날리는 길옆에는 작은 마을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흘러가는 가벼운 발걸음이 느려지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느리게 흐르는 시간에 배도 고픈 줄 모르면서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식당을 찾아온다. 햇살은 따가워도 1월이라 그런지 그늘에서 맞는 강바람은 차다. 옆 테이블의 여행자들이 누더기 같은 이불을 덮고 앉아 있는 것이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깨끗하지도 않은 이불을 가져다 무릎에 덮게 된다. 이미 반해버린 비어라오를 음료수처럼 먼저 마시면서 기약 없이 느리게 서빙되는 식사를 기다린다. 길게 누운 태양에 황톳빛 우강이 반짝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시는 비어라오는 건조해진 목젖을 적신다. 서늘한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나무 그늘 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내리쬔다.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어설프게 내리막길을 더듬어 강가로 내려온다. 므앙응오이와 외부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배들은 아무렇게나 강기슭에 누워 있고 강가에 면한 울타리가 쳐진 작은 밭에서는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해가 진다. 한결 부드러워진 저녁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고, 선착장으로 걸어온 아이 둘이 스스럼없이 옷을 벗어 빨래와 목욕을 시작하는 것을 검은 개가 지켜봐 준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와이파이가 구비되었다는 레스토랑이나 게스트하우스 광고들이 나무판자에 현란(?)하게 적혀있다. 그리고 그 너머는 조용한 마을일 뿐이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나 랜드마크를 찾아 열심히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곳에 오면 안 된다. 이곳에서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이 "쉼"을 의미한다면 여행은 이곳 므앙응오이로 와야 한다.


 '므앙응오이'라는 지명은 이방인에게 달팽이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부는 바람이 시시각각 어떻게 달라지는지, 머리 위를 내리쬐는 태양빛이 언제 뜨겁고 언제 부드러워지는지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느끼고 있다. 아침에는 안개를 헤치고 선명한 자태를 드러내던 물결이 낙조를 받아 반짝이며 잔물결을 일으키는 변화를 알아챌 수 있다. 느릿느릿 흐르는 시간의 숨결이 거기 있다. 높은 산은 깊은 그림자를 만들고 황톳빛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숙소 앞의 해먹에 누워 있자니 전기도 없었다는 그 시절에 올 걸 하는 후회가 일어난다.


어제 고물버스로 산길 이동을 한 데다, 추위에 떨며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피곤해진 몸은 저녁 식사도 거부한다. 신축된 숙소는 깔끔하고 침대도 쾌적하지만 작은 골목 건너편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리는 나무집이다. 그럭저럭 불을 밝힌 어두컴컴한 골목에 사람들이 오가고 여행자들이 강변에 찾아와 식사하는 소리를 모두 들으며 잠에 빠진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눕히고 시간이 지나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한밤중이 된 것을 깨닫자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진다. 그리고 한참을 눈을 깜박거리게 된다. 꿈은 아닌데 눈앞이 말 그대로 캄캄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침대를 더듬어 문을 찾아 나간다. 흐르는 우강에 반짝이는 달빛이 시야에 들어온다. 은둔의 마을 므앙응오이의 밤은 인공의 불빛이 하나도 없어서 그렇게 캄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아닌 밤중에 잠도 덜 깬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므앙응오이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로 돌아간다. 잠이 꿀맛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포장도로 위의 고물버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