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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liver Jan 25. 2017

그야말로, 소소한 하루

므앙응오이에서의 별 일 없는 시간들

골목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음성마저 그대로 들려오는 나무집이라 초저녁엔 두런두런 시끄러웠지만 시골마을의 저녁은 금세 어두워져 고요가 찾아왔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비몽사몽을 헤매다가 한밤중에 한 번 깬 후로 숙면을 취했더니 아침이 개운하다. 쌉쌀한 공기를 들이키며 맞이하는 아침은 글자 그대로 상쾌하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니 눈이 저절로 떠진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선착장에서는 빨랫감을 세탁하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안개가 자욱한 일월의 아침, 황톳빛 강물이 흐르는 선착장의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그림 같다. 빨래가 끝나자 막대를 어깨에 두르더니 막대 양편에 빨래가 담긴 양동이 두 개를 저울처럼 메고 집으로 돌아간다. 

어제저녁에는 여행자 몇몇이 오가던 숙소 옆 골목으로 아침산책을 나간다. 알싸한 아침 공기가 폐로 스미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 위에는 행인 따위는 안중에 없는 닭들이 땅을 헤집고, 누가 누구의 어미이고 새끼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는 개들이 모여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마을의 아침이 고요할 것이라는 이방인의 예감은 정확히 빗나간다.


겹겹이 둘러싸인 산들을 안개가 가리고 있는 므앙응오이의 아침, 일찌감치 일어났을 마을 사람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허름한 집 앞,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될 골목에서 벌써 아침식사도 마친 건지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침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다. 가게 셔터를 올리고 물건을 진열하느라 가게 주인의 손길은 분주하다. 몇 개 안 되는 물건이 하루에 얼마나 팔릴까 한숨이 나오지만 정작 가게 중인의 얼굴은 느긋하기만 하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많은 양을 팔아 큰 이익을 남기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온 나는, 이른 아침의 낯선  풍경과 알싸한 공기가 상쾌하기만 하다. 

수천 년 신비가 숨어있는 세계문화유산이 주는 밀물 같은 감동만이 여행의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초현대사회에서 날아온 탓인지, 므앙응오이의 아침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산이 거기에 있고 그 산 뒤의 산도 그곳에 있고 강물은 흐르고 있으며, 사람도 동물도 어제처럼 그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일찍 일어났으니 긴 하루가 오롯이 남는다. 숙소에서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다가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자도 그만일 테지만, 가보지 않은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인적도 별로 없는 길가에서 꼬마들을 만난다. 학교에 가는 것인지 놀러 가는 것인지 작은 가방을 메고 꼬질꼬질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다. 동행이 주는 사탕을 얼른 받아 입에 넣고 웃어 보이는 얼굴이 천진난만 그 자체다. 닭이 꼬꼬댁거리며 꼬마들 주위에서 맴돈다. 


사탕의 달콤함에 입맛을 다시는 꼬마들과 헤어져 길을 걷는다. 길이라야, 나와 동행만 먼지를 날리며 걸을 뿐 인적도 없다. 목적지가 있는 발걸음도 아니라서 말없이 천천히 걷게 된다. 무념무상,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   

파노이동굴(Phanoi Cave)로 가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이 작은 마을에서 표지판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할 일도 없던 차에 동굴로 가보기로 한다. 길 옆 오솔길을 따라 트레킹 하는 기분으로 걷는다. 


동굴 입구에 도착하니 간이 매표소가 있다. 오지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입장료가 있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 반가우면서도 우습다. 입장료를 지불하자, 신선처럼 앉아 있던 관리인이 몸을 일으켜 허름한 나무문에 걸린 자물쇠를 비밀의 화원이라도 여는 듯 조심스레 열어준다. 무엇이 있는지 왜 가는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이곳에 도착한 우리는 이제 천천히 동굴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나무뿌리와 바위가 얽힌 길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오르는 길에 대나무 난간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길임은 틀림없다. 운동화도 아니고 지난 여행에서도 즐겨 신던 밑바닥 닳은 크록스를 신고 나왔더니 오르기가 더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바위 표면은 매끄럽지 않고 뾰족뾰족하다. 이곳이 카르스트 지형이라더니 석회암이어서 침식이 많이 된 것인지 얕은 지식으로 예측만 할 뿐이다. 

고도도 높고 가파른 길을 대나무 난간에 의지해 오르자니 힘이 든다. 뾰족한 바위들 때문에 서 있기도 걸음을 옮기기도 쉽지 않다. 할 일 없는 하루 천천히 돌아보려고 나선 길이건만 예상보다 높은 난이도에 연신 땀을 훔치며 오르게 된다. 어느새 뷰포인트에 도달한다. 저 아래서 바라보던 작은 마을과 선착장, 흐르는 강물과 우뚝 선 산들이 발 그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내려오다 생각해보니, 처음에 우리가 향한 곳은 '동굴'이었는데, 뷰포인트에만 올랐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세심히 주위를 둘러보니 길 옆 작은 틈새로 진짜 석회암 동굴이 보인다. 오를 때 설마 저 동굴은 아니겠지, 가다 보면 좀 그럴싸한 동굴 입구가 나오겠지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명도 없이 시커먼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해서  그 앞의 조잡한 불상 사진만 찍고 있는데, 현지인 가이드를 동반하고 헤드랜턴을 쓴 서양인 두 명이 동굴을 찾아온다. 나야 준비 없이 오게 된 입장이지만 그들이 부럽지 않다. 므앙응오이에서는 부산스러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므앙응오이에서는 별 일이 없는 게 맞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리. 어차피 별로 할 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던 하루였는데 본의 아니게 트레킹까지 하게 된 것으로도 대단한 하루가 되었다. 일교차 큰 라오스의 일월, 한낮의 태양은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다. 터덜터덜 오던 길을 더듬어 숙소에서 옆 식당에 들어간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원래 사람이 없는지 손님이라고는 우리뿐이다. 손으로 덜어 동그랗게 뭉쳐먹는 대나무 찰밥인 "카오냐오"는 무엇을 주문해도 꼭 함께 시키게 된다. 더운 기운을 날려줄 시원한 비어라오도 잊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경치를 즐기다가 이번엔 가보지 않았던 서쪽 길로 향한다. 별것 안 하는 하루지만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소소한 발걸음이 좋다. 므앙응오이에서는 강물이나 바라보고, 비오 라오나 마시고, 산책이나 하는 것도 꽤 큰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학교 앞 공터에는 누구 하나 온전히 서있는 아이가 없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웃고 싸우느라 바쁘다. 한나절을 노는 아이들 곁에 누런 개 한 마리가 함께 뒹군다. 마을 골목에도 역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알까기, 망까기, 놀다 보면 하루는 너무도 짧아~"라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풍경이다. 므앙응오이의 아이들과 이 노래는 너무도 잘 어울린다. 거대한 산 그림자 사이로 붉은 해가 저물고 대나무 담장 안,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두워진 길을 더듬어 숙소로 간다. 

어쩌다 보니 여기저기 돌아다닌 하루였다. 바쁜 발걸음이 아니었기에 피곤하지는 않다. 점심을 먹으러 들렀던 숙소 옆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또 간다. 손님 하나 없던 낮과는 달리, 어디선가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태양이 사라진 하늘과 산이 검은 그림자 그대로 강물에 투영한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잠시 말을 잃고 일몰을 응시한다.


겨우 일곱 시가 넘었을 뿐인데, 므앙응오이는 무섭게 암흑 속으로 빠져든다. 인공의 불빛이 최소화된 산골마을의 밤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강가의 적막함이 생소하지만 이내 그 평온함을 즐기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 것 같은 동행처럼, 별 일 없는 므앙응오이에서의 하루가 마음속에 쏙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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