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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liver Jan 01. 2017

칸의 부엌, 라오스의 별빛

라오스 루앙남타, 시골마을에서의 홈스테이(3)

늘어진 햇살을 받으며 아이들과 마당에서 노는 사이, 홈스테이 가정의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저녁 준비를 하러 가는 모양이다. 가이드 북의 아주 간단한 라오스 편 회화를 찢어 들고 얼른 그녀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간다. 요리를 어떻게 하는지도 궁금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의 주방일을 도우며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다.

이미 아궁이에는 불이 지펴있다. 라오스 인들의 주식인 찰밥을 찌는 것이다. 낮은 벽돌 몇 개로 만든 소박한 아궁이에서 나무를 때서 밥을 해 먹는 풍경은 영화의 세트장에서나 볼 법한 이질적인 풍경이다. 불 위에 물이 담긴 솥을 놓고 그 위에 찹쌀을 넣은 대나무 찜통이 하얀 김을 쏟아낸다.

낮은 의자에 앉아 작은 다리 달린 도마를 놓고 콩깍지를 다듬는 엄마를 돕는다. 하나하나 다듬는 손길이 정성스럽다. 무지막지한 칼로 다듬기에는 힘든 것 같아 배낭을 뒤져 휴대하고 다니던 맥가이버칼을 꺼내오니 엄마가 반색을 한다. 이참에 라오어 회화를 펼쳐 말을 건다. 가이드북의 짧은 회화는 간단한 통성명과 숫자, 여행에 필요한 몇 마디 말들이라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이야기가 통한다. 아이 엄마의 이름은 칸, 나이는 이제 스물둘이다. 그렇게도 점잖아 보이는 남편은 겨우 스물다섯이라고 한다. 두 딸들은 여섯 살과 네 살이라는데, 라오어를 잘 모르는 내가 회화책을 뒤져 들은 것이라도, 제대로 듣긴 한 건지 놀랍기만 하다. 이렇게 농업이 중심인 나라에서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는 것이 맞을 것이지만, 그러면 칸은 열여섯에 아이를 낳은 베테랑 주부라는 말이 된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온 나에겐 놀라울 수밖에.


더듬거리며 한글로 표기된 라오어를 읽는 나를 바라보며 웃는 칸의 얼굴은 해맑다. 밖에서 동행과 놀고 있던 아이들이 원, 투, 쓰리, 포 하며 영어로 숫자를 세는 소리에 칸의 눈빛이 빛난다. 그렇게 일찍 결혼을 했으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을 리 없는 칸은, 영어는 오케이라는 단어 빼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자신과 달리 아이들은 영어를 배운다는 자부심이 새겨진 얼굴이다.

그러는 사이 찰밥이 쪄진다. 칸은 나중에 반찬이 완성되면 함께 먹어야 하는 밥을 포대 위에 올려놓고는 뜨겁지도 않은지 맨 손으로 몇 번을 치대서 둘둘 말아 놓는다.  사탕수수 비슷한 나무껍질을 벗겨 손질하고 생강도 씻어 놓는다. 칸은 아궁이 하나에서 찰밥도 찌고 국도 끓이고 나물도 데친다. 그녀는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두 시간 동안 저녁 준비를 한다. 채소들을 데쳐내고 무치고 해서 만든 요리들을 부엌의 낮은 테이블에 놓는다. 흙바닥이어도 칸이 수시로 치워서 깨끗한 편이다. 가만히 보니 물을 강에서 길어 와서 바깥에 두고 써야 해서 채소 씻는 물도 알뜰하게 아껴 쓴다. 식수는 생수통에 따로 받아쓰고 있다.


그녀는 상을 번쩍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며 홈스테이 손님을 위한 밥상을 차린다. 찰밥을 조금 손에 모아 주물러서 동글게 만들어서 입에 넣는다. 반찬은 입맛에 많이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 입맛은 이제 가히 국제적이 되어서 비주얼이 이상한 육식이 아니라면 이런 채식요리는 어떤 음식도 맛있게 먹는다.

가족들은 식사 후 텔레비전을 켠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들의 뒷모습이 따듯해 보인다. 라오스에는 태국 방송이 방영된다고 한다. 라오어와 태국어는 비슷해서 잘 알아듣는다고도 한다. 현대적이고 화려한 태국 드라마의 배경과 광고들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21세기 현대 문명을 아득한 별세계로 여길지, 아니면 손 닿는 세계라고 인지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라오어 회화책이라도 사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낮에는 강가에서 아이들이 목욕할 정도로 햇살이 따가웠지만 밤이 되자 기온은 급격히 하강한다. 홈스테이의 잠자리는 매트리스와 두 겹의 이불이다. 따로 방이 없어 함께 자야 하는 구조라서 그런지 손님들에게는 분홍색 모기장을 쳐 준다. 색다른 기분이다.


손님의 잠자리까지 꼼꼼히 봐주고 난 부부는 밖으로 나가서 차를 마시며 마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눈다. 둘째 아이는 이미 잠이 들었고 여섯 살 큰 딸은 컴컴한 불빛에 의지해서 엎드려 숙제를 한다. 책가방도 따로 없이 구겨진 비닐에 책과 연필이 들어가 있다. 누구에게 물려받았을 낡은 책은 그나마 유네스코에서 나눠 준 것이다. 아이는 얇은 볼펜심을 쥐고 글씨를 쓴다. 필기도구라고는 3센티미터 정도 되는, 그 작은 손에도 쥐어지지 않을 것 같은 몽당연필과 볼펜심이 전부다. 동행이 한국에서 준비해 온 연필 한 다스를 얼른 꺼낸다. 연필 깎을 칼도 없어서 맥가이버 칼을 꺼내 두 자루를 깎아 준다. 우리 생각에는 너무나 좋을 것 같은데, 아이의 얼굴은 오히려 멍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모르는지, 기쁨을 표현을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표정이다.


갑자기, 오늘 마주한 이 모든 현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진다. 21세기, 우주로 관광을 가는 세상, 인터넷으로 세계 어디서나 연결이 되는 세상인데 이곳은 말로만 듣던 전쟁 후 1950년, 60년대의 한국 같다. 아이의 공부는 하나도 봐주지 않고 밖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칸이 답답하다고 느끼는 건 한국에서 온 여행자의 조바심일 뿐일까? 이 현실이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방인의 기우일 뿐이기를...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온다. 아이의 엄마 아빠와 이웃사람들이 마당에 불을 피워 놓고 차를 끓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간간이 웃음소리도 섞인다. 말이 안 통하니까 애매한 웃음만 지어 보이고 어두워진 마을을 산책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밤은 완벽히 어두워서 불빛이 없다면 그저 암흑일 것만 같다.

 

차가워진 공기에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든다. 까만 하늘에 생각도 못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서, 인도의 자이살메르에서, 세계 각지에서 예쁜 밤하늘을 보았지만 오늘의 별 또한 그것들에 못지않게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모닥불이 사그라지자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암흑 속 정적만이 남은 산골마을에서의 시간은 느릿느릿 흐른다. 별을 한없이 쳐다보고, 밤하늘을 찍는다고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동행과 나도 집으로 돌아가 분홍 모기장 속에 눕는다. 집이라고 해봤자 엉성한 널빤지다. 그 틈새로 찬바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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