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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oon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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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Apr 21. 2020

생일날 - 2018

 11월 20일 내 생일. 매년마다 돌아오는 생일 뭐 별거 있겠냐마는 그게 이번엔 하필이면 탕갈루마로 가기 바로 전날이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골드코스트에서도 더 아래쪽인 바이런 베이. 쉴 새 없이 이동해야 해서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리라는 걸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불과 일 년 전 생일에는 축하해주러 찾아와 준 고마운 내 초등학교, 대학교 친구, 부모님과 함께 고깃집에서 부모님께서 사주신 저녁을 맛있게 먹었었는데.

 서퍼스 파라다이스로 돌아가자마자 짐만 챙겨 브리즈번으로 떠나야 하므로 오전에는 바이런 베이에 있는 울워스에 들렸다. 목욕 용품, 세제 등등 원래는 하루 전날 골드코스트로 돌아가서 여유롭게 장을 봐야 했지만 여기 오고 나서 갑자기 계획이 변경된 거라 촉박해도 할 수 없었다.  
 버스 타러 가기 전 여기서 우연히 알게 된 리바이와도 작별 인사를 나눴다. 바이런베이에 언제쯤 다시 올 거냐고 리바이가 물었지만 아무래도 다시 오지는 못할 거 같다고 솔직히 말했다. 일단 섬으로 들어가면 아예 떠나기 전까지는 어디로도 안 갈 테니까.
 수많은 백팩커스들로 바글대는 버스 터미널에서 12시에 버스를 타고 바이런 베이를 떠났다.

 호주에 오게 되면 취업도 취업이지만 일단은 숙소가 가장 우선적인 걱정거리였다. 은행계좌나 텍스 파일 넘버 등과 관련해 안정적인 주소지가 필요했는데 언제 취업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집을 구하기도 애매하고 또 호스텔에서 지내자니 초기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돈 할아버지 댁에서 지낼 수 있게 된 덕분에 다행히 모든 게 수월하게 잘 풀렸다. 한국에 있을 때 이상하게 다른 곳보다도 왠지 골드코스트로 가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 이런 행운이 따르리라는 걸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취업도 금방 잘 되었고 여행도 무사히 잘 마쳤으니 더 바랄 게 없는 좋은 시작이다.
 2시쯤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지만 시간에 쫓기는 터라 바로 떠나야만 했다. 브리즈번으로 떠나기 전, 취업 소식에 나만큼 기뻐하셨던 할아버지께서 기념주로 사다 놓으신 화이트 와인으로 함께 축배를 들고난 뒤에 트램 정류장에서 정말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내 생일이라 더 제대로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걸 할아버지는 굉장히 아쉬워하셨다. 한 번도 캥거루 고기를 먹어본 적 없는 나를 위해 고기도 사다 놓으셨는데 결국 먹을 기회가 없던 것도 덤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그냥 여유롭게 브리즈번 시내에 도착한 뒤에 근처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호스텔에서 하루 묵은 다음 새벽 일찍 우버를 타고 선착장까지 가면 완벽했을 텐데. 그런데 유럽에 있을 때 워낙 아날로그식만 여행을 다녔었고 호주에 오기 전까지 한 번도 우버라는 걸 이용해 본 적도 없었어서 내 생각이 너무  짧았다.
 탕갈루마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선착장에 가야 하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당일 아침엔 대중교통이 없고 전날인 오늘 밤 6시 전후에 버스가 끊긴다고 해서 무조건 그때까지 이동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지금에서는 이해가 전혀 안 될 정도로 어쨌든 그때는 그렇게 무지했다.

 골드코스트에서 브리즈번 탕갈루마 선착장까지 경로는 이러했다. Surfers Paradise에서 Helensvale까지 트램, Helensvale에서 브리즈번 센트럴까지 기차, 센트럴에서 Toombul까지 다른 기차, Toombul에서 590번 버스 타고 가다가 내려서 30분 걸어서 선착장 도착. 툼불에서 590번 버스의 막차 시간은 6:54분이었고 나는 틈틈이 시간을 계속 체크했다.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브리즈번 센트럴 역 근처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곳에선 환승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할 수 없이 툼불에 도착하고 나서야 막차 버스를 타기까지 딱 한 시간 정도 남길래 이것저것 따질 새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앉기도 전에 바로 스테이크를 주문했으나 먹어보니 내가 기대했던 부드러운 육즙이 흘러넘치는 청정 호주산 스테이크 맛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주류샵에서 5달러짜리 와인 한 병을 사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고 버스에 올랐다.

 가는 길 내내 승객이 나 혼자뿐이라 아빠뻘 되시는 기사님이랑 계속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대체 이 시간에 왜 이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지 의아해하셨다. 지금은 그때의 내가 얼마나 어리숙했는지를 알기에 웃음만 나오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 상황이 꽤나 중대하고 심각했다.
 탕갈루마에서는 나더러 배 타러 새벽 6시 반까지 오라고 하지, 버스는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 사이에 운행을 아예 안 하지, 시티에서 묵어도 다음날 이른 새벽에 택시를 탈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그때까지 우버를 정말 몰랐다) 그러다 혹시 시간을 놓쳐서 첫날부터 늦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정말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냥 지금 선착장으로 미리 가서 그 앞에서 밤을 새울 거라고.  그렇지만 진심으로 너무 걱정해주시는 기사님을 안심시켜 드리려고 “But guess what. It’s my birthday today! What a special unforgettable day!”라고 외쳤으나 그 말을 듣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던 기사님의 표정에 오히려 정작 걱정스러워해야 할 내가 웃음이 터졌다.

 버스에서 내려도 거기가 바로 선착장이 아니라 또 더 안쪽으로 3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면접 보러 가는 아침에도 길 위에 사람이 없었는데 그보다 더한 깜깜해진 밤에 그 길을 나 혼자서 캐리어까지 질질 끌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거의 다 도착한 건 같은데 이번엔 날이 어두워서 그런지 지도를 봐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고 와중에 배터리까지 나가려고 해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헤아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멈추었다. 안에 타고 있던 크리스라는 남자가 창문을 내리고 내게 말을 걸었다. 밤인 데다가 이런 외지에 나 혼자니까 두려웠으나 그는 내 얘기를 듣더니 선뜻 차로 선착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아뿔싸. 당연히 열려있을 줄 알았던 선착장 게이트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원래 안쪽 대합실에서 밤을 새우려고 했었는데 선착장 밖은 아무것도 없는 쌩도로라 난처했다.

 선착장 바로 근처에 있는 한 기계회사에서 그날 열두 시간을 일하고 집으로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던 크리스가 나 때문에 공교롭게 발이 같이 묶였다. 내가 괜찮다고, 나 그냥 여기 놔두고 가도 된다고 하는데도 계속 같이 대안들을 고민해줘서 죄송하면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크리스가 제안한 첫 번째 대안은, 근처에 있는 공항 때문에 에어텔이 몇 군데 있으니까 거기 내려줄 테니 혼자 묵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길에 데리러 와서 선착장으로 데려다주시겠다는 것. 하지만 에어텔을 가봤더니 부르는 하룻밤 숙박비용이 너무 비싸서 바로 포기했다.
 두 번째 대안으로, 마지막 배가 섬에서 육지로 아직 안 돌아왔다고 해서 희망을 놓지 않고 그 시간에 맞춰 같이 선착장에 다시 가봤다. 반갑게도 게이트는 잠깐 다시 열렸지만 보안 문제로 게이트 안에서 있을 수는 없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캐리어만 사무실에 맡기고 떠났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데 크리스가 이대로 여자인 나 혼자 두고 가기가 걱정된다면서 근처에 있는 24시간 울워스로 가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회사에 샤워실이 따로 있어서 같이 밤새고 자기도 아침에 바로 출근하면 된단다.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크리스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고 정말 진심으로 내가 걱정돼서 그런다는 게 마음으로 느껴졌다.
 울워스에 가서 먹거리를 이것저것 샀다. 과일, 과자, 음료, 그리고 너무 저렴해서 산 10개 한 박스 아이스크림까지. 세 가지가 맛이 있는데 뭐가 나올지 몰라서 아무거나 먹다가 결국 둘이 함께 9개를 해치우고선 마지막 하나는 핸드폰을 충전하던 내 옆에 앉아있던 영국인 여자에게 주었다. 오늘 선착장에서 밤샐 거라 했던 내 말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부모님께 전화도 드렸다. 우연히 만난 친절한 크리스 덕분에 무사히 잘 있다는 내 소식에 비로소 안심하셨다.

 새벽 다섯 시 반쯤에 평소에도 자주 간다는 카페로 나를 데려가 뜨뜻한 카페라테와 맛있는 아침식사를 사주고 난 후에야 나를 다시 선착장으로 데려다준 크리스는 정말 정말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정말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마다 마치 누군가가 날 지켜주기라도 하는 듯 나는 항상 적재적소에 알맞은 도움의 손길을 받고는 한다. 내가 먼저 요청하기도 전에 선뜻 먼저 나서서 도와주려는 사람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순간이 예전부터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우연히 만난 크리스가 나를 구제해주었다. 아니면 타지에서 홀로 맞이하는 생일 쓸쓸하지 말라고 하늘에서 보내주신 천사인가.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이런 좋은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더 아름다울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호의들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그런 사람들처럼 나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타인에게 생각지 못한 호의들을 베풀 수 있으면 카르마는 계속 돌고 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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