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읽고
사실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따로 읽어본 적은 없었다.
시를 읽는다는 건 산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은근 부담으로 다가온다. 시는 산문보다 비밀이 많다. 솔직하게 말해주기보다는 속에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소녀 같다. 그래서 시집을 골라내어 읽는 건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를 더 써야 하는 것 같은 부담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시집과 함께 산문,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는 책들은 좀 다르다. 무엇보다 시인이 왜 이 시를 썼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놓는 경우가 많아 읽는 부담이 한결 덜하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는 특히 정호승 시인이 직접 가려뽑은 60편의 시와 함께 잔잔한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어 나처럼 정호승 시 입문자에게 좋다.
시와 산문은 한 몸입니다. 제 영혼과 육체가 저를 이루듯 제 시와 산문이 제 문학을 이룹니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는 '정호승 시가 있는 산문집'이지만 '정호승 산문이 있는 시집' 이기도 합니다. 시의 배경이 되거나 계기가 된 이야기들을 그 시와 함께 한자리에 한 몸으로 모아놓은 것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렇게 조금씩 읽어내려가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는 구성이 참 좋다. 특히 다가오는 가을, 시를 읽으며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하고 싶은 따뜻한 책이다.
책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정호승 시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봄길>과 <수선화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옮겨놓는다. 아직 가을이기는 하지만 언젠가 다가올 봄날을 기대하면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인생은 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간다.
..내 인생길은 한바탕 장맛비가 지나가고 폭설이 내린 뒤 곳곳에 웅덩이가 팬 골목길이다. 나는 지금까지 부지런히 걸어왔다.
..나는 요즘 내 인생의 길이 어느 계절을 배경으로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졌는지 곰곰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봄길이다. 그 봄길 한가운데를 휘적휘적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남는 사람, 나중에는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
..봄은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온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춥고 어려워도, 그래도 감사한 것은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봄이 찾아와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폭설이 내린 혹한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걸어가는 길이 봄길이 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내 나이 마흔여덟일 때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대뜸 물었다.
"호승아, 니는 요즘 안 외롭나?"
나는 약간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도 집사람한테 외롭다. 그런데 니는 지금까지 헛살았다. 나이 오십 다 됐으면서 아직도 '내가 왜 외롭나' 그런 생각하나? 니가 무슨 이십 대냐? 그러면 너는 요즘도 '인간에게 왜 죽음이 존재하나' 그런 고민 하나?
우리가 인간이니까 외로운 거야. 외로우니까 사람이야.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이야. 삼라만상에 안 외로운 존재가 어딨노? 본질을 가지고 '왜'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야. 본질은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친구에게 해준 말, '외로우니까 사람이야' 를 가지고 결국 시 <수선화에게>를 쓰게 되었다. 인간의 외로움에 빛깔이 있다면 어떤 빛깔일까. 연약한 꽃대 위에 핀 수선화의 연노란 빛이 인간의 외로움의 빛깔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제목을 <수선화에게>로 삼았다.
이렇게 이어지는 시인의
시와 산문을 읽다 보면
아.. 시인들은 이래서
시를 쓰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라는 건, 어떤 특별한 체험에서 짠 하고 나타나는 건 아니다. 시는 오히려 같은 일상 속에서도 조금씩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는 힘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조각하고 다듬은 예술품 아닌가 싶다.
시인의 마음에
풍덩 빠져보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