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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씨앗 Sep 18. 2023

장례식장에서 생긴 일 (1)

도대체 저 아줌마는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2023년, 7월 28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930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겪고, 광복과 6.25를 함께 겪으며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아오셨던 할아버지셨다.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글씨를 아주 잘 쓰셨고, 한문도 거리낌 없이 쭉쭉 써 내려가셨다. 한때는 정치에도 관심 있던 열혈청년(?)이었다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지금까지 사셨던 시골 산골마을로 들어가셨다고 하셨다.

 당시 면서기(면의 서무를 맡아하는 서기=공무원)등 좋은 자리를 주겠다는 주변의 회유에도 꿋꿋하게 지조를 지키셨다던 할아버지였다.

 술만 드시면 자신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며 슬피 우셨다는 할아버지는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모두 보시고 93세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6남매를 둔 할아버지에게는 13명의 손주들과 4명의 손녀사위, 3명의 손녀며느리 9명의 증손주가 있었다. 그중 큰 아들의 둘째 딸인 나는 손주 중에 나이로는 두 번 째였다. 물론 아들을 중시하는 집안이라 둘째 딸이지만 막내 남동생보다 못한 취급을 받긴 했었다.


 가족들이 많기도 했고, 결혼해서 각자 가정을 이루고 난 뒤는 할아버지를 뵈러 갈 일이 많지가 않았다. 코로나 전에는 그래도 1년에 한 번쯤은 왕래했었는데, 코로나가 터진 뒤로는 한참을 못 뵈었던 것 같다.

 올 3월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요양원에 계셨던 할아버지였지만, 최근 6월까지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7월 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1년 전, 암진단 이후, 할아버지는 손녀인 내게 꼭 전해주라며 아빠를 통해 손 편지를 보내셨던 적이 있다. 꼭 괜찮질 거라고 할아버지가 꼭 빌겠다고 적힌 손편지였다. 암 진단 이후 마음이 비뚤어졌던 내겐 편지는 관심밖이었다. 아무런 위로도 받고 싶지 않았다. 내 건강이 회복되어 이제 얼굴을 뵈러 가려는 참이었는데 이제는 할아버지가 떠나셨다.

할아버지가 보내신 편지


 고모들과 작은아버지, 그리고 큰 아들인 아빠까지 직계자손들은 큰 슬픔에 잠겨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투병생활이 있었기에 다른 가족들은 나름 다들 차분해 보였다.


 1월 말, 항암을 끝내고 6개월 차,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됐고, 빡빡 밀었던 머리도 잔디처럼 무성해졌다. 오랜만에 본 고모들은 소식 들었다며 나의 건강과 안부를 물었다. 집안 행사나 결혼식장 이후로 보지 못했던 사촌동생들과도 오랜만에 인사를 나눴다. 모두 꼬꼬마였던 기억뿐인데 벌써 회사원이 된 동생도 있었고, 아이 부모가 된 동생들도 있었다.


  저녁 늦게 도착한 나에게 엄마는 급히 현금이 있는지 물었다.

"너 현금 가지고 있는 거 있어? 있으면 보내줄 테니 빌려줘봐. 도우미 이모들 고생했는데 갈 때 차비라도 챙겨줘야지."

엄마는 도우미 이모들이 너무 고생했다며 현금을 따로 챙겨서 이모님들에게 드렸다. 엄마가 주시는 차비를 받고 환하게 웃으며 도우미 이모님들이 가셨고, 나는 남은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장 뒷정리를 도왔다. 모두들 정신이 없어 보였고,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손님이 줄었다.

 손님맞이에 바빠 정신없는 어른들을 대신해 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이 합심해서 뒷정리를 도왔다. 내 경우엔 평소 장례식에 갈 일이 거의 없던 터라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식탁보를 깔고, 먹은 그릇을 치우고, 손님 상차림을 도왔다. 첫날은 너무 정신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잘 넘어갔던 것 같다.


- 장례식 2일 차

  아침에 일어나 대충 씻고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상주라는 부담감 때문인 지 남동생은 가장 일찍 장례식장에 도착해 자리를 지켰다. 나와 언니는 아이들 밥을 먹이고, 형부와 남편은 이모님들이 오시기 전에 미리 준비해둬야 할 것들이 있다고 해서 정리를 도왔다.

 곧이어 사촌동생들도 하나둘 도착했다. 아기들이 아직 어려 오지 못한 동생들을 제외하니 까마득한 막내들만 한가득이었다. 80년대 후반생의 동생들은 아이를 낳거나 육아하느라 바빴기에 대부분이 90년생 이후 동생들이었다. 어렸던 동생들이 나보다 훌쩍 큰 어른이 된 걸 보니 내가 새삼 나이 먹었음이 느껴졌다. 띠동갑이 훨씬 넘는 막내 동생들과 함께하려니 왠지 모를 책임감이 느껴졌다. (가장 막내 사촌동생은 우리 딸과 4살 차이 중학생이었고, 질풍노도의 고등학생도 있었다.)


 항상 집안일은 엄마나 언니가 리드하고 나와 동생은 대부분 묵묵히 따르는 타입이었기에 왠지 모를 큰언니, 혹은 큰누나(?)라는 타이틀이 낯설었다.

 사촌 동생들이 자란 만큼 젊고 활기찼던 고모와 고모부도 어느덧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기에 나름 젊은 편인 언니와 나, 그리고 동생들이 함께 열심히 하려고 마음먹었다.

 30대 후반, 내 나이로 보면 한참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장례식장에 가본 경험도 별로 없거니와 수술과 항암 후 회복 중인 라 터라 체력도 바닥이었고, 경험도 없어 뭐부터 해야 할지 사실 몰랐다.


 오전 10시가 넘어 이모님 두 분이 오셨다. 어제와는 다르게 한 분은 약간 싸 해보이는 얼굴이 왠지 기분이 안좋아보였지만 나는 피곤하신 거라 생각했다. (어제 따로 차비까지 챙겨드렸는데, 표정이 변해서 좀 그랬다.)

 나는 전 날에 했던 것처럼 상 치우고, 기타 잡다한 심부름을 맡기로 했다. 154cm 최단신인 나를 제외하고 사촌동생들은 모두 키가 컸다. 여자키 162~165cm 사이, 남자키 177~183cm 사이라 나이로는 제일 연장자지만 겉보기엔 내가 제일 꼬꼬마 같아 보였던 것 같다. (없는 머리와 망가진 피부를 가리기 위해 생머리 가발과 마스크로 얼굴도 잘 가렸다) 고모들과도 친했던 나는 언니, 남동생과 달리 오랜만에 동생들과 안부도 묻고 동생들과 어울려서 으쌰으쌰 일을 도왔다.


 막내삼촌의 대학생 딸인 사촌 여동생은 국을 푸고, 나는 밥을 푸다가 손님들이 나가시면 다 함께 급히 달려가 상을 치웠다. 그러다가 손님이 오면 다시 또 밥을 푸러 갔다. 밥을 푸다가 과일이 떨어졌다고 해서 과일을 사 오고 다시 동생들을 도와 상을 치우고 있는데 뒤에서 이모님 한 분이 어깨를 툭툭 쳤다.


 "아가씨, 이거 방울토마토 꼭지 좀 따줄 수 있을까?"


 40이 다 되어가는 애엄마한테 아가씨라는 말은 인사치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뭐 요즘 결혼 안 한 내 친구들 나이를 생각하면 호칭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얼른 방울토마토 꼭지를 따고 바구니에 담아서 올려놓고 이모님에게 방울토마토 꼭지를 다 따놨다고 말을 건넸다.


 "꼭지 땄으면 어쩌라고? 알아서 씻어야지.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꼭지를 따라고 해서 꼭지를 땄는데 대뜸 이모님이 화를 냈다. 꼭지를 따면 알아서 씻어야 하는 거였을까? 내가 당황하고 무안해하고 있으니 그 옆에 있던 이모님이 달려오시더니 내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뺏어 들었다.

 

"어, 고마워요. 이건 내가 씻을 게. 다른 거 해요."


 그러면서 급히 주방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내가 부탁받은 이모님을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 똑같은 안경을 쓰고 계셨지만 한 분은 키가 크고, 한 분은 키가 작았다. 다짜고짜 화를 내는 이모님을 보고 두 이모님을 착각하면 큰 일어나겠구나 싶어 두 분의 차이점을 확실히 기억하기로 했다.


 '저 키 큰 아줌마한테는 안 가야겠다. 왜 자꾸 성질내지?. 내가 자기 아랫사람도 아닌데...'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 키 큰 이모님 밑사람이 아니고, 여기 상갓집 상주 딸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내가 저 이모님 밑에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서러웠을까?

 

 오랜 시간 육아와 살림만 하다 보니 전쟁터 같은 일터에서의 기억이 차츰 흐려졌던 건 사실이었다. 세상은 냉혹했다. 나도 사회에서 일할 때는 이보다 빠릿빠릿했고, 혼나도 슬프긴 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슬프기보다 화가 났다. 그래도 상황이 너무 바쁘다 보니 그런 일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나는 동생들과 다시 상을 치웠다.


 웬만하면 키 큰 이모님과 겹쳐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동선이 겹치다 보니 계속 툴툴대고 짜증 부리는 게 귀에 거슬렸다. 서른 초반의 여동생, 이십 대 중후반의 남동생 2명, 대학생 여동생, 고등학생 남동생, 중학생 남동생 한 명씩이었다. 내가 더 열심히 나서지 않으면 어린 동생들이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어릴 적에 봤던 지라 계속 어리게만 봤던 것 같다.)

 

 항암하고 쉬면서 모아뒀던 에너지를 모두 발휘해서 열심히 돌아다니며 상을 치웠던 것 같다. 앉을 시간조차 없어서 종아리가 팅팅  부었다. 나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키 큰 이모님이 나를 째려보며 또 한 마디를 하셨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암판정을 받고 조금이나마 달라진 건, 굳이 억울하고 분한 일이 생길 때 참기만 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쁜 와중에 도우미 이모님들과 싸우고 있을 순 없었다.


 바로 엄마에게 달려가 얘기했다. 엄마는 분한 나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힘들면 일하지 말고 방에서 좀 쉬라고 했다. 무리하면서까지 할 필요 없다고 하셨다. (어쩌면 그때 오히려 쉬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점심이 넘어 오후쯤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오셨고, 이모와 외삼촌도 오셔서 인사를 하려고 잠시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나 다시 주방으로 왔더니 키 큰 이모님이 또 비아냥 거렸다.


 "기가차네, 손님도 아닌데, 상주가 왜 손님자리에 턱 앉아있고 그래~"


 방금 자리에 앉아있다 주방으로 온 나는 혼잣말보다도 큰 비아냥 거림이 영 귓가에 거슬렸다. 나는 바로 또 엄마에게 달려가서 도대체 도우미 이모님이 왜 저러냐고 따졌다.

 엄마는 다 사정이 있으니 나보고 참으라고 했다. 지금 와주신 도우미 이모님은 작은아버지(막내삼촌) 회사에서 파견 나온 이모님이라서 엄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동생들에게도 괜히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독불장군 도우미 이모님 때문에 짜증이 밀려왔다. 왜 다들 아무 소리도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어제저녁에 봤던 그 이모님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만 처음부터 부드럽게 말하던 키 작은 이모님은 언짢아하는 나와 사촌동생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쉬는 타임에 밖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화장실에 다녀오시는 작은어머니를 만났다. 답답한 마음에 지금 화난 이유를 설명하니 작은어머니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야 끽해야 마흔 살이라고 치자. 그래도 작은 어머니면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집안 서열도 높은데도 불구하고 작은 어머니에게도 투덜대고 짜증을 낸다는 것이었다.

(도우미 이모님 나이는 50대 중후반쯤, 작은엄마 나이는 40대 중후반이라 역시 만만히 보심)

 

 그러다 전날 밤 그 이모님이 친절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도우미 이모님들은 막내작은아버지(막내삼촌) 회사에서 파견 나온 분인데, 그 회사사람들이 어젯밤에 왔던 거였다. 친절한 말투로 웃으며 불편한 게 없는지 많이 드시라고 다른 손님보다도 후하게 음식을 내주셨던 모습을 떠올리니 더 화가 났다.

 

 혼자 화내고 부글부글하는 나를 언니와 동생이 말렸다. 상주 완장을 차고 지휘 중인 남동생보다도, 여러 가지 잡심부름을 해주는 언니보다도 열심히 일한 나였다. 지금 가장 건강이 안 좋은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 욕을 먹는다고? 왜??

 언니는 화난 나를 달래며 그냥 돕지 말고 아예 쉬라고 조언했다. 엄마도 쉬라고 했다. 작은 엄마들도 쉬라고 했다. 점심도 못 먹고 일했는데 오후가 되면서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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