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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아파트로 돌아왔다 (2)

(2) 기억도 나이를 먹어가고,

by awerzdx

이 아파트는 전주시 효자동과 삼천동의 경계에 있다. 효자동에서 삼천동(1동)으로 뻗어나가는 언저리인 이곳에는, 1980년대 중후반 증가하는 인구와 팽창하는 도시 속 주거지 수요에 따라 당시로서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주공아파트(1, 2, 3단지)와 쌍용아파트(1, 2단지)를 시작으로 광진목화아파트, 세경아파트, 삼익아파트, 개나리아파트, 오성대우아파트 등등, 이후 인접한 남쪽으로 추가되는 곳들까지 더하면 더 많지만, 당시 살고 있던 곳에서 길 하나 건너면 있던 저 정도까지가 내겐 심리적으로 '우리'라고 칭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8살 때 삼천동의 아파트로 이사온 후 유년시절 내내 5층짜리 아파트 단지는 나와 친구들에게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는 아파트단지와 거의 맞닿아 있었고, 친구들과 늘 놀던 곳은 아파트 동과 동 사이 놀이터나 나무가 우거진 언덕 같은 곳이었다. 동 사이가 비교적 가까워 바로 앞 동에 살던 친구를 창문 너머로 부르면 친구가 답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동네에 정말 많은 아파트가 들어선만큼 국민학교 3~4학년 때는 점심먹고 학교에 가는 '오후반'을 했다. 전학 오는 학생들, 새로 입학하는 학생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오후반을 하고도 반 학생수가 80명이 넘었다. 교실은 책상, 의자, 사람으로 꽉 차 정말 발디딜 틈이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들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그렇게 한 학기 내지 일 년을 보내고는 더 이상은 안되겠던지, 내가 다니던 삼천국민학교 근처에 '삼천남국민학교'가 새롭게 개교했다. 삼천국민학교 학생들 중 (아마도) 개나리아파트 이하 그 남쪽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삼천남국민학교 학생이 되었다. 우리들은 눈물의 생이별을 해야만 했고..



또 하나의 인상적인 기억은 10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아파트 단지 안에서 치르던 일이었다. 장례식장 개념이 없었을 당시에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누군가 돌아가시면 동과 동 사이 바닥(주차장) 위에 천막을 치고 장례를 치렀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모든 것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지만 아파트 단지 안에 쳐진 천막에서 오가는 분들을 맞이하며 인사하고, 절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어느날은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 삼익아파트 쪽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무서운 형들을 만나 돈을 뺏기기도 했다. 돈을 뺏긴 그 길목은 늘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외진 느낌이 있어 지날때마다 멈칫하게 했는데, 그날은 친구와 둘이서 학교 끝나고 뭔가를 사먹고 큰 길가에서 아파트 단지 쪽으로 들어오다가 그 일을 겪고야 말았다.


도움을 청할 경로가 없는 곳에서 중학생 형들을 마주친 우리는 얼어붙은듯, '가진 돈은 이것 밖에 없어요.' 라는 눈빛으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보였고, 형들은 우리의 눈빛과 손짓을 한 번에 믿고는 돈을 가로채 유유히 우리에게서 멀어졌던 기억.



1980년대 중후반부터 준공되기 시작한 그 단지들 중 먼저 지어진 주공 1, 2단지와 쌍용 1단지는 재건축이 완료되고 그 이름도 바꾸어 높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주변의 나머지 단지들은 각자가 먹은 나이만큼 늙어가고 있다. 이사온 후 근처를 한 번 돌아보았는데, 35~40년씩 나이를 먹은 아파트들만큼 동네도, 사람들도 나이를 먹고 활기를 잃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나이를 더 먹은 나도 아직 이렇게 쌩쌩한데?..


그 아파트 단지들에는 내 유년시절의 기억과 시간들이 담겼고, 나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물리적인 아파트의 나이도 이젠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자, 그럼 이제 답은 뭘까? 재건축, 그것 밖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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