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리뷰_國手가 전하는 고수의 생각법
고스트 바둑왕을 보고 초등학교 바둑반에 들어가게 됐는지, 바둑반에서 바둑을 배우다 보니 흥미가 생겨 고스트 바둑왕을 보게 된 건지, 지금으로서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하나 확실한 것은 열 살 남짓 내 어린 시절에 바둑은 유일하게 재미를 느낀 취미생활이었다는 점이다. 특별활동 시간이면 바둑판을 펼쳐놓고 착수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컴퓨터 게임에 빠지기 전까지 2~3년 정도는 바둑에 푹 빠져 있었다.
1990년대는 바둑의 시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까지 바둑판에 코를 박고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대다. 잉창치배 1회 대회에서 우승한 조훈현이 김포공항에서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을 정도니 그때의 바둑은 지금으로 치면 축구나 야구의 인기에 맞먹을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이창호, 이세돌 같은 이들이 한국 바둑의 명맥을 이었지만 바둑 자체의 인기가 시들하다. 이제 바둑 기사는 조선일보 같은 종합신문에서도 한참을 뒤로 넘겨야 1단이나 2단으로 짤막하게 실릴 정도다. 조훈현이 바둑의 대중화를 위해 바투 같은 새로운 장르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초단위로 세상이 돌아가는 21세기에 바둑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잊고 살던 바둑을 되살려준 책이 있다. 조훈현이다. '국수(國手)'로 불리는 조훈현이 자신의 바둑 인생을 되돌아보는 책을 냈다. 이름은 '고수의 생각법'이다. 세계 최다승(1938승)이자 세계 최다 우승(160회)자이니 자칭 고수라 할 만 하다.
바둑에 관심 없는 사람도 많을 테고, 조훈현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바둑을 몰라도, 조훈현에 관심이 없어도 일독할 가치가 있다. 바둑과 조훈현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읽어둘 만한 책이다. 조훈현은 자신의 바둑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화려한 수식어도 필요 없고, 별다른 공치사도 없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이야기니 수식어니 공치사니 무의미하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평생을 승부사로 살았기 때문일까. 매 이야기마다 흥미진진한 포인트가 있다. 고수의 생각법은 잉창치배 1회 대회 최종 결승 5국의 순간부터 시작된다. 웹툰 미생에 실린 바로 그 대국이다. 잉창치배는 당대 최고의 국제 바둑대회였다. 조훈현은 결승 5국에서 녜웨이핑을 이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미생이 주목한 결승 5국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린하이펑과의 준결승 1국에 있다. 조훈현은 준결승 1국에서 빈삼각을 두 번 두면서 승리한다. 빈삼각은 내가 초등학생 때 바둑을 배울 때도 금지된 행마법이었다. 하지만 조훈현은 "빈삼각 자체만 보면 비효율적이지만 바둑판 전체로 볼 때에는 오히려 위기를 뛰어넘는 묘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날의 승리로 바둑계의 변방이었던 한국이 일본,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한국류(流)의 출발이다.
조훈현의 스승은 일본의 국수였던 세고에 9단, 조훈현의 제자는 한국의 이창호 9단이다. 스승 세고에와 제자 이창호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일본의 국수였던 세고에 겐사쿠는 평생 3명의 제자만을 받았다.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 중국의 우칭위안, 그리고 한국의 조훈현이다. 조훈현을 제자로 들였을 때 세고에의 나이가 74. 모두가 깜짝 놀란 일이라고 한다. 조훈현은 스승 세고에로부터 바둑보다도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비인부전 부재승덕'. 세고에는 조훈현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술보다는 인성을 가르치는데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썼다.
"살면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야."
이류는 서러워. 쿤켄, 네가 이 길을 가기로 했다면 일류가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불쌍해.
한국에 돌아와 국수에 오른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인다. 이창호와 조훈현의 바둑은 전혀 다르다. 제비라는 별명이 붙은 조훈현이 발 빠른 공격을 앞세운다면, 돌부처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이창호는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바둑을 한다. 1988년 28기 최고위전에서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첫 패배를 당한다. 그 첫 패배가 반집차이였다. 바둑판에는 반집이 없다. 반집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것은 덤 때문이다. 이창호의 반집차 첫승을 놓고 운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조훈현은 반집차이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조훈현은 "반집승은 창호가 발견한 나의 아킬레스건이었다"고 고백한다. 스승과 다른 새로운 '류'를 이창호가 만들어낸 것이다.
바둑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주류로 유명한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은 단 하나의 수를 결정하기 위해 제한시간 8시간 중 무려 5시간 7분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 5시간 7분 동안 그는 정말 진지한 얼굴로 바둑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케미야 9단은 그 5시간 7분 동안에 머릿속에서 수백 판의 바둑을 두고 허물고 두고 허물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마침내 놓은 결정의 한 수, 그것은 세상을 향해 나는 이런 바둑을 펼쳐보겠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그의 선언이다.(148p)
시대가 변하고 바둑도 빨라지고 있다. 한판을 두는데만 하루 종일 걸리던 바둑이 이제 한 시간, 두 시간이면 끝나기도 한다. 제한시간은 갈수록 짧아진다. 흔히들 바둑판을 인생사에 비유한다. 바둑의 제한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 삶의 흐름도 빨라지는 것 같다. 전까지는 하루 한 시간 단위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이제는 분초를 다퉈가며 움직이고 생각해야 한다. 주마간산(走馬看山) 속에 나를 잊지 않기 위해 고수의 생각법을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