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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Jay Jan 02. 2023

새해 첫날 마주한 죽음의 장면, 가장 깊은 슬픔에 대해

슬픔 또는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 ㅡ 언젠간 기록하고 싶었던 그 날

새해 첫 날 아침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독일의 소도시에 위치한 우리집 바로 옆에는 외국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공동 묘지가 있다. 제각각 다른 크기의 무덤과 비석이 세워져있고, 꽃과 인형 같은 것들이 놓여있다. 크리스마스나 연휴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먹을 것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지만 고풍스러운 비석과 꽃들 때문인지 스산해 보이지는 않아보였고 오히려 평화롭다. 난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고 한 번씩 죽음을 떠올린다. 나의 죽음, 나의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 그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걷다보면 모든 감정들이 일순간 고요해진다.


“언젠간 땅이 부족해질텐데 화장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남편의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내 생애 처음으로 화장을 목격했던 날, 나의 할머니를 내 손에 쥐고 뿌렸던 날, 그 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한 순간에 내가 블랙홀에 빨려드는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할머니의 죽음을 알게 됐던 건 2019년 초여름, 정신없는 회의실에서였다. 점심 시간을 몇 분 남겨둔 그 날도 무언가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던 중이었다. 꽤 오래 연락이 없던 아빠가 카카오톡으로 ‘할머니 돌아가셨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정신없던 회의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 모든 것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 후론 아무말도 들리지 않았고, 심장에 탁 무거운 것을 올려놓은 듯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다들 점심을 먹으러 나간 빈 회의실에서 아빠와 통화를 했다. 모든 말들이 믿겨지지 않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며 회의실 안을 한참을 서성였다.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계시던 대표님께 부고를 알리고 급히 가봐야겠다고 했을 때, 슬픔을 이해한다는 대표님의 눈빛과 위로의 말에 갑자기 울컥 눈물이 고였다. “나도 할머니가 키워주셔서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사흘을 내리 울었어. 마음이 너무 힘들겠다. 다른 일 생각하지 말고 얼른 가봐.”


속초 장례식장으로 가는 고속 버스 안에서 할머니를 생각했다. 어릴 적 나와 동생을 키워주셨던 할머니, 유독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 때문에 할머니는 동생이 태어나고부터는 우리집에서 꽤 오래 함께 사셨다. 할머니는 모든 손주들 중에서도 내 동생을 가장 아꼈지만 나에게는 마치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처럼 굴었다. 엄마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때론 없던 일도 지어내서 나를 모함하기도 했고, 동네 할머니들을 불러모아 나의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나쁜 년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험담과 거짓말이 쉬웠던 할머니에게 11살이던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대들고, 험담에 동조하던 할머니 친구들에게 악에 받쳐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살았던 할머니는 나의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툭하면 나의 숙제와 학습 자료를 폐지로 팔아넘겼다.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받으면서도 키로당 몇 천원 받는 폐지 모으는 게 취미였던 할머니에게 모든 종이는 폐지일 뿐이었다. 모범생이라고 칭찬받는 데 목숨걸었던 욕심 많은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할머니를 미워했고 할머니도 나를 싫어했다. 동생이랑 싸우고 있으면 무조건 동생 편을 심하게 들어서, 어떤 날은 동생이 “할머니 그만해요! 이번엔 제가 잘못한 거 맞아요!”하고 할머니를 벙찌게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난 지독한 편애로부터 소외감을 느꼈고, 습관적으로 거짓말과 의심을 일삼는 어른에게 환멸감을 느꼈고, 나의 엄마를 못된 며느리라고 온 동네 사람에게 험담하는 할머니를 증오했다. 


그랬던 할머니를 장례식장에서 몇 년 만에 만났을 때, 여전히 아무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제야 왔냐며 할머니가 너희를 너무 보고 싶어하셨다는 큰엄마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국화꽃을 놓고 할머니 앞에서 절을 하는데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나의 회사로부터 온 근조 화환이 놓여있었다. 참 이상하게 그걸 본 순간 눈물이 났다. 현실감없는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너무나도 나의 현실 그 자체이던 회사로부터 위로가 적힌 꽃을 받은 그 순간, 그냥 마음이 무너졌다. 미룰 수 없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나의 현실이 되었다.


화장을 하기 직전 할머니는 평안하게 누워계셨다. 내가 아는 우리 할머니가 맞는데 조금 더 작고 야윈 몸으로 편안하게 잠들어 계셨다. 고모네 식구들과 고향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신 후 고요히 잠든 그대로 깨어나지 않으셨다는 할머니는 그저 편안하게 잠든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이 조금 더 길기를 바랬는데 커튼이 쳐졌고 불길이 언뜻 비쳤다. 화장을 하는 동안 사흘 내내 울었던 고모는 한 번 더 무너졌고, 무너지지 않았던 아빠와 형제들도 목놓아 울었다.


나에게 가장 슬프고 충격적이었던 순간은 화장된 할머니를 만났을 때였다. 방금 전까지도 편안하게 누워있던 할머니가 너무나 작은 병에 담겨있었다. 나에게 늘 소리지르고 남 험담도 잘하고 쌍스러운 욕도 하던 그 할머니가 너무나 고요하게 작은 병에 담겼다. 이렇게 작아질 거면서 왜 그렇게 영원히 커다랄 것처럼 나에게 모질었는지, 나는 왜 이렇게 작아질 사람을 미워하고 두려워했는지. 나에게 그렇게 모질었던 할머니를 한 손에 잡았을 때 또 한 번 현실감이 없어졌다. 할머니를 뿌리면서 나도 함께 소멸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강하던, 나와 엄마를 힘들게 했던, 두려울 것 없어보이던 고집 센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이 나의 세상을 뒤흔들었다.


돌아가시기 2년 전, 갑작스럽게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모님의 이혼 후 거의 십여 년을 연락없이 지냈는데 처음으로 할머니가 나에게 전화를 거셨다. “할머니 너무 아픈데 죽기 전에 얼굴 보러 와라.” 어릴 적의 미움 같은 건 이미 사라졌고, 오히려 서먹함이 더 컸던 나로서는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이 컸지만 주저할 수는 없었다. 동생과 함께 할머니를 찾았을 때 할머니는 유독 내 손을 잡고 내 이름을 많이 부르셨다. 너 정말 잘 컸구나, 너 정말 예쁘게 자랐구나. 몇 번이나 나와 동생을 헷갈리신 거라 생각했는데 그 날은 유독 나에게 그리움을 많이 보이셨다. 30년 전에도 “나는 늙어서 곧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했던 할머니는 내 나이 서른을 앞두고도 같은 말을 하셨다. 걱정이 됐지만 병원에서도 큰 문제가 없고 연세가 있으셔서 소화가 안 되는 것이라고 해 그저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한 번 더 할머니를 찾은 후론 다시 또 내 삶에 바빠 할머니를 잊고 살았다.


커다랗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한 때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달관하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누군가를 영원히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누군가를 완전히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에게 상처를 줬던 가족이니까 10년 넘게 안 보고 살아도 그립지 않았다고, 오히려 돌아가셔도 덤덤할 것 같단 생각도 했다. 단 한 번도 내 가족의 죽음을 겪어본 적 없던 스물 아홉의 내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날 이후로 내가 한 때 사랑했던 모든 사람의 죽음이 두려워졌다. 죽음은 생각보다 더 나를 무너트렸고 약하게 만들었고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을 안겼다.


지금도 무덤가를 지나거나 누군가의 죽음을 들을 때면 할머니를 한 손에 쥐던 순간이 생생해지면서 마음이 가라앉는다.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을 두고 ‘귀신 소굴에 두지 말라'며 살아계시는 내내 자식들에게 화장을 해서 고향에 뿌려달라고 하셨던 할머니는 결국 원하던 대로 멀리 뿌려졌다. 예쁜 비석과 꽃으로 꾸며진 무덤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켠으로는 부러움도 컸다. 저렇게 찾아갈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는 것처럼 그 순간만큼은 죽음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도란도란 돌아가신 분에게 말을 걸며 참 많이 사랑했다고, 보고싶다고 말할 수 있음이 부러웠다.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말마따나 좁은 곳에 갇혀 외롭게 혼자 있도록 두는 것도 마음이 아팠을 것 같아서,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그냥 마지막엔 고개를 젓고 생각하기를 단념해버린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누구의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누구의 죽음을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걸음마조차 떼지 못했다. 떠올리면 여전히 나는 스스로가 하얀 가루가 되어 소멸하는 듯한 기분이 들고, 현실감이 사라지며 두려움이 엄습한다. 지금의 내가 유일하게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외면이다. 죽음에 대해 떠올리지 않는 것. 그냥 여전히 먼 곳에서 할머니가 사람들에 둘러쌓여 건강하고 활기차게 잘 지내고 있다고 믿는 것. 언젠가 우리가 그 때 그 모습으로 다시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란 외면없이는 이 세상의 소중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여전히 이 글도 마무리 짓는 방법을 모르겠다. 내가 힘든 건 할머니의 죽음이 충격적이어서인지, 할머니를 그리워할 거란 걸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인지, 다시는 할머니를 못 만난다는 것 때문인지, 나를 포함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걸 생생하게 알아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죽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더 약해졌고, 두려움이 많아졌고,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가장 깊은 슬픔을 경험했다. 죽음을 경험하기 전의 호언장담하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사랑하는지,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지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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