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사람을 찾게 되는 다섯째 아이
'19호실로 가다'는 또 빌려만 놓고 열 장을 못 넘겼다. 결국 주야장천 연장만 하다 반납을 했다. 하루는 집에 오는 길에 습관처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검색하다 눈에 띄는 책을 발견했는데, 작가가 또 도레스 레싱. 결국 읽어야 끝나는 게임에 빠졌다 생각했다.
180장 남짓인 이 책은 생각보다 재밌고, 생각보다 예민한 주제들이 많고, 생각 외로 공포물이다. 그래서 앉은자리에서 다 읽지 못했다.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돼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때로는 그 상황에 놓여 있는 듯 한 느낌에 섬뜩해지기도 했다. (주로 '자식들을 이렇게까지 많이 낳을 필요가 있는 거야?' 였던 것은 안 비밀)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 까다로움이나 절제가 단지 인기 없는 자질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p.7)
인생은 한 번 뿐 욜로를 혼자 즐기면 되는데, 교묘하게도 하나의 평가지표가 되어 은연히 강요되고, 하나의 지향점 비슷하게 되어가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서, 이 문장에 나를 투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성향은 '대체로'로 표현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하지 않을까. 사람은 언제나 두어개의 분야에선 평소 사고방식과는 다른 결심을 하기 때문인데, 이 책 속 부부 역시 절제와 까다로움을 지녔지만, 자녀계획에서 만큼은 노절제를 선언했다. 지금은 두 명이고, 돈도 빠듯하지만 아이를 많이 낳을 예정이고, 돈은 없지만 호텔 같은 이 집이 필요한 것 처럼.
자신들의 수입이 미미함을, 또한 자신들의 허약함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질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마치 심판을 받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항상 잘못된 생각이라고 판단하는 그런 믿음에 굳건히 매달리는 것 외에는 자신들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미미하고 부적절한 존재인 것 처럼 느꼈다.(p.17)
읽은 사람 찾습니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버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켰던 때에,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 이제 보아라, 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 그 개성은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가장 최상을 선택했다. -바로 이 삶. (p.31)
우린 벌받는거야. 그 뿐이야.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p.159)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행복한 가정은 비정상적인 한 아이가 태어나면서 행복했던 가정이 된다. 이 과정의 여러 상황-소설같지만 현실같은-에 대해 나눌 말이 정말 많다. 해리엇과 데이빗의 행동을 비난 해야하는 것일까, 이해 해야하는 것일까. 폴이 이상한건가, 벤이 이상한건가. 주위 사람들의 조언(혹은 훈수 혹은 참견)은 적절한건가. 마지막으로 보여지는 이 가족의 모습을 붕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한 가정이 변하는데 가장 유효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나는 너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쩌면 나눠 질 이야기들이 각자의 배경과 가치관이 버물어 져 매우 사적일 수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긴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100인 100색일 흥미로움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가!
행복한 가정
우리는 행복의 강박 속에서 사는 것 같다. 가족/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태초의 위안과 안락함을 절대 부인 할 수 없지만, 그 근원적 상징 앞에 꼭 행복한이란 형용사를 붙일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이렇게 쓰면서도 우리 집은 행복해요! 라는 사족 같은 문장은 덧붙이고 싶은 걸 보니 이 책은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이 슬픈 공포물을 읽으신 분을 찾아요.
식탁의 넓이가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다. 수많은 손과 손가락, 소매들, 여름날 벗은 팔들, 어른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엎드려 잠든 아이들의 뺨들, 모두들 박수치는 가운데 그 위에서 붙잡아 주면 걸음마를 시작하던 아기들의 통통한 발들. 이 모든 것들, 20년 세월이 어루만지고 매끈하게 만져주어서 이 넓은 식탁은-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