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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Dec 08. 2022

오랜 취향의 영역

담배, 커피, 술. 그리고 신발.


    "형, 형은 정말 수염 기르셔야 해요." 이렇게 잘 자라는데 썩히면 안 된다고 당부하는 동생의 말이었다. 순례길이 끝나고 포르투갈로 넘어간 이유는 단순하고 확실했다. 5년 전, 프랑스 길보다 앞서 포르투갈 길을 걸었을 때 눈여겨둔 바버샵이 있었기 때문에. 제주에서 한참 신세를 졌던 만춘 서점의 영주 누나가 돈을 부치며 함께 건넨 말도 있었다. 이 돈은 꼭 바버샵에서만 써. 난 그 말을 지켰다.


    취향이라는 건 손쉽게 변한다. 유행에 맞춰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며 기분에 따라 올곧게 지켜온 습관적 선택을 묵살시키기도 한다. 가능하다면 선호할 뿐 반드시 그게 아니라서 안 되는 것 또한 아닌. 그래서 취향은 취향이다. 적은 감상과 짙은 애착으로 형성되어 손쓸 수 없이 당하고 마는 것.



    담뱃불을 빌리는 것을 좋아한다.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긴 하나 그렇다 하여 내가 스스로 붙이는 일은 자주 없다. 무시로 사람들에게 불을 빌리며 짧은 대화를 하는 게 좋다. 어차피 담배가 전부 탈 때까지 우린 함께 있어야 하니까. 쉽게 접근하고 쉽게 붙잡아두는 작고 요긴한 물건에서 나는 취향을 본다. 가지각색의 라이터들, 편의점에서 구할법한 단순한 재질도 있고 화려하며 기름을 채워 넣어야만 하는 번거로운 것까지. 그건 잠시 내게 왔다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몇 마디 말을 이자로 함께 건넨다. 그 행위로 시작되는 수많은 것들이 나를 구해왔었고.


    카페의 평가가 관대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입맛만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게 전부 커피에 조예가 깊은 터라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낸 사람이 수두룩했고 레쓰비나 자판기 커피가 전부인 줄 알았던 난, 까탈스러운 사람들 덕에 여전히 가난한 여행을 지속한다 해도 커피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정말 즐겁고 고급스러운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취향이다. 다른 공간, 다른 사람이 만든 커피의 맛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시간을 빛나게 소비하는 선택인 것만 같아서.


    나는 순례길 완주를 기념하기 위해 럼을 샀다. 내가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된 계기였던 아바나 클럽 7년 산. 순례자 증서야 아무 의미도 없으니 진작 불태워버렸고 그냥 얌전히 술이나 마시고 싶었나 보다. 어떤 술은, 그리고 구하기가 까다로운 술이야말로 얽힌 기억에다 재빨리 나를 옮겨둔다. 그리하여 이 술을 보자마자 산 뒤 기억을 남기고 싶은 곳에서 열었다. 그럼 언젠가 다시 술병의 라벨을 보기만 하더라도 난 원하는 기억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넌 뭘 포기할래? 요즘 즐겨 묻는 질문에 친구들은 곤란해했다. 담배와 술, 그리고 커피. 그중 하나만 포기한다면. 와 정말 어렵다. 순전히 기호품이니까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야만 하는 것과 남길 것을 고른다면. 생각만으로도 괴로울 테니 하나만 없애기로 한다면 과연. 곧장 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시간을 고민하다가 다시 또 바꾸고 마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좋아하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그런 식이니까.


    신발이 참 예쁘네요. 응 예쁘지. 수염을 기르라고 구박하던 동생이 박박 우겨서 샀어. 마음에 들었는데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 신발이야말로 사람을 드러내는 지표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선에서 멋진 신발을 신어야 하지 않겠어? 신발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듯, 나는 어느 것도 잘 포기하기가 어려운 사람인지 모른다. 취향의 영역 안에서는. 오래될수록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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