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드리드.
포르투에서 리스본을 거쳐 마드리드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코로나는 끝나지 않을 테지만 오미크론 변이의 끝무렵이기도 했다. 이제 막 국경이 열린 포르투갈에서는 아직 열차가 복구되지 않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전엔 포르투에서 마드리드행 직행 버스와 기차도 오고 갔으나 지금의 내게 선택권은 없다. 마음이 좀 쓸쓸했다. 이쪽 지역은 모든 도시에 추억이 서려있었고 잠시 리스본에 대한 생각이 아른거렸으나 마드리드가 급했다. 여행을 다니며 몇 군데 마음의 고향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단연코 마드리드. 스페인 마드리드로.
자정에 다다랐을 시간 도착한 리스본 버스터미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인파가 들끓었고 어디로 가는지도 정확히 모를 버스를 향해 다들 이동하기에 떠밀리다시피 배낭을 메고 달렸다. 왜 달리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마드리드! 마드리드! 머리가 벗겨진 버스기사가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은 우왕좌왕. 티켓은 의미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좌석번호가 의미가 없던 거다. 줄이 늘어지고 눈치껏 바로 서서 앞뒤 사람에게 듣자 하니 아직 국경을 넘는 버스의 전산작업이 원활하지 않아 오버부킹이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아뿔싸, 내 앞에서 딱 좌석이 끊기고 만다.
이래서 달렸던 거구나. 그래서 어안이 벙벙한 채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냐 물었는데 30분 뒤에 추가 차량이 도착한다고 했다. 30분. 허무하다. 글쎄, 나에겐 고작이라 말할 수 있는 30분이 급한 사람들이었겠지. 습기가 몰려온다. 리스본 바다의 짠내음이 몰려온다. 전통음악인 파두를 들으며 앉아 챙겨 둔 빵을 으적으적 씹어먹는다. 순례길이 끝나고, 아니 끝나기 전에도 이런 류의 바쁨은 없었으니까. 가지 않은 곳을 가 보는 게 어떻냐는 말을 들었었다. 너는 늘 다시 간 곳에 실망하잖아. 분하게도 나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형은 내게 말했다.
어느 도시를, 나라를 다시 간다는 건 지난날의 기억을 덧씌우는 과정이었다.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난 자주 분개했고 힘들어했고 그러고 난 뒤에야 비로소 슬퍼했다. 그렇다고 하여 기억이 어느 한 점에 머무르는 걸 두려워할 수는 없었다. 기억은 선이 되어야 한다. 이어지고 관통해야 한다. 더 젊은 날, 더 이전의 분위기를 그리워함으로 가면 형의 말대로 실망할 테지. 지금은 지금. 내가 반가울 것들만 챙길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터미널 바닥에 앉아 몸서리를 쳤다. 더운 날씨인데도.
새벽녘, 동이 트기 직전의 하늘은 캄캄했다. 익숙한 버스 터미널에서 기차역을 지날 때 여명과 함께 빛나는 하늘, 그리고 비행기가 허공을 찢으며 나는 걸 봤다. 내가 수없이 걷던 길들에서 5년 전의 나를 봤다. 열심히 시장에 나가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게스트 하우스 청소를 하며 지냈던 나였다. 그때의 사람들과 그 시절의 나는 꽤 좋아 보였다.
짐을 풀고 씻은 뒤 난 아주 깊은 잠에 들었다. 마드리드에 있으면서 마드리드의 꿈을 꾼다. 지금의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 꿈. 기억을 가져온 내가 일어났을 땐 벌써 초저녁이었다. 이미 마드리드의 박물관, 유적지 등은 질릴 대로 갔고 또한 변함없을 테니 내가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다니던 장소들이다. 마음속 진정한 장소들을 찾아서 골목을 걷는다.
게스트 하우스가 있던 자리는 아마 누군가 살고 있겠지. 난 그 골목의 가게들을 기억한다. 지내던 건물 바로 아래 타파스와 생맥주를 팔던 선술집에 가야겠다. 아 맞다, 돼지 귀 볶음도 있다. 난 그저 구석에 앉아 조용히 술을 한 잔 하고 값을 치르고 나와야겠다. 그런 다짐으로 가게에 갔다. 오래된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다짐 따위는 맥주 거품만도 못하게 됐지만.
나야! 박하!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이던 웨이터는 잠시 갸우뚱하다 두 손을 번쩍 들더니 다가와 포옹했다. 이 녀석이 나를 기억하는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 다시 어설퍼진 감정으로 물었던 것 같다. 나를 기억해? 그럼, 초이와 함께 일하던 노란 머리 녀석 아니야. 이제 검정 머리가 됐네. 그러더니 별안간 슬롯머신을 돌리는 사장에게 누가 왔는지 보라고 소리친다. 초이는 함께 일하던 게스트 하우스의 최 사장님. 선술집의 모두가 날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은 참 야속할 때가 잦다. 여행을 하는 입장으로선 더더욱. 마음대로 조작되기가 일쑤인 기억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괜히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심히 나빴던 것 같기도 한 저마다의 기억은 순순히 믿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러나 다만, 적어도 나를 기억한다는 상대방의 말은 내 기억으로 높낮이가 정해지지 않는다. 기억한다. 기억한다는 건. 그리하여 나는 다시 거칠게 맥주를 시켰다. 늘 먹던 걸로 라는 되지도 않는 농담을 던지며 말이다. 웨이터 친구가 오늘은 자신이 산다며 함께 잔을 부딪치고, 이렇게 오래 근속할 줄 몰랐다는 내 말에 다음에 와도 있을걸? 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참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리스본에서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있거나 그보다 더 이전, 기나긴 순례길을 걸었던 순간의 슬픔이 모조리 사그라들었다. 내 기억은 이제 무엇으로 바뀔까. 지금 이 순간 마드리드의 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언젠가의 내가 돌아볼 수 있을까. 나는 틀렸다. 어느 장소로 다시금 향한다는 건 기억을 덧씌우는 과정이 아니라 기억을 이어나간다는 것임을. 이제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