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방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 Jan 19. 2023

잠자리를 찾는 수고

그리고 시를 쓰는 사람.


  겉핥기로 알던 로마에 도착했을 때 가끔 느끼는 특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말로만 많이 들어서 안다고 착각하는 기분. 유구한 역사보다도 먼저 재미있는 역사라는 것이 있다. 세계사를 배우면 온갖 나라의 과거를 알게 되지만, 개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 재미있는 역사. 도시 하나로서의 이름이 아닌, 로마라는 나라로서 존재할 때의 시간이 그랬다.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고들 했다. 어째서 다른 느낌을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는지는 의아했으나 그런 건 어느 땅에서나 마찬가지였다. 파리는 확실히 우울했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냥 개인의 사념일 뿐, 로마 역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느낌대로 흐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도 울적하지는 않겠지. 기대를 하지 말자. 대신 우울하지도 말자.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우울할 틈이 없는 도시였다 로마는. 넘쳐나는 관광객 탓에 힘들거라 예상했지만 무참히 깨져버렸다. 골목마다 도시가 풍기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곳. 구석을 돌 때마다 마주치는 대단한 유적들. 그게 현대적 가게들과 한 데 얽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밝았다. 걸어야만 했다.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쉬지 않고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사랑에 빠진 거다.


  맛있는 것들과 친절한 사람들을 겪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래 머물고 싶었다. 마침 부활절 주간이라 모든 숙소엔 자리가 없었고 유럽의 연휴까지 겹쳐 인근 나라에서도 놀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마지막 숙소에서 직원에게 이런 처지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더 머물고 싶은데 잘 곳이 없어.


  옥상에 아마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내 배낭에 달린 텐트와 침낭을 보더니 우스개로 한 말이다. 그럼 나야 좋지. 어차피 아래에선 보이지도 않을 거고. 그는 막 웃으며 영화 ‘기생충’을 보았느냐 물었다. 거기 나오는 가족이 사는 집처럼 비가 내려 떠내려갈지도 몰라.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버티겠지만, 일단 진짜 할 거냐는 눈빛에서 '재밌겠다'는 느낌까지 가득이었다. 그래 하지 뭐.



  그는 분주히 매니저에게 연락을 했다. 여기 한국인 하나가 와서는 옥상에다 텐트를 치고 싶대요. 내일부터는 다시 방이 나오니까 그렇게 하는 게 어때요?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만 했다. 안 되면 어떻게 하지. 잘 곳을 찾지 못하면. 오늘 다리 근처에서 만났던 홈리스를 떠올린다. 그는 열심히 글을 적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공책에 쌀알만한 글씨를 빼곡하게. 무엇을 쓰나요? 나는 물었다. 시를 쓴다오. 그는 답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집이 없는가. 집이 없는 사람은 시를 쓰는가. 그의 옆에 놓인 봇짐에는 이불부터 여러 가지가 쌓여있었다. 어디든 잠자리가 될 수 있었다.


  폴대를 다시 챙겨 숙소를 나왔다. 기생충과 더불어 올드보이를 좋아하는 직원이 내게 브로피스트 자세를 취했다. 행운이 있길 바란다면서. 행운이란 건 내가 원할 때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으나 어디에나 산재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나는 조용히 다리 근처로 걸어가 여전히 시를 쓰는 사내의 옆으로 가 앉았다. 로마의 모든 것을 담은 시를 쓰고 있다고 했다. 아 그러세요.


  날이 이렇게 좋은데 잘 곳이 없어. 그는 펜을 멈추고 어눌한 영어로 대꾸했다. 날이 좋은데, 잘 곳이 왜 없어. 날이 좋으면 어디든 잘 곳이 될 수 있다는 말 같기도 했다. 담배를 물고 보니 여기저기 문의해 둔 숙소 중에 한곳에서 연락이 왔다. 취소된 자리가 있으니 일단 오라고. 사내는 다시 시에 몰두하고 있었다. 잠자리를 찾는 수고를 아껴 시를 쓰는 사람보다 글을 잘 쓸 자신은 없었다.






@b__aka

매거진의 이전글 익숙하고 낯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