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이해 Jan 07. 2016

나의 한국 친구들에게

나의 한국 친구들에게 브런치작가©기이해 

브런치작가©기이해

나의 한국 친구들에게


“So, are you Chinese or Japanese?"

“너는 중국인이니 아니면 일본인이니?”


해외에서 생활하는 동안 사람들은  인사로 나와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은 의례적으로 나에게 "너는 아시아 어디에서 왔니?"라는 질문 대신 위의 질문과 같이 “중국 혹은 일본 어느 쪽에서  왔니?"라고 물어보았던 이 사소한 질문 하나가 나의 궁금증을 매우 자극했다.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시아는 크게 5 지역으로 나뉘게 되는데 우리나라가 속 동북아시아를 포함하여, 중앙, 남, 서남, 동남아시아로 나뉜다. 동북아시아의 대표인 나라로는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대만, 몽골 분명히 이렇게 여러 나라들이 존재한다. 이와같이 아시아에는 중국과 일본만 있는 것이 아닌데 외국인들은 동양인을 보면 중국인이거나 혹은 일본인일 거라는 인식만 가진 듯하다.

              

그 이유는 중국과 일본의 문화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세계적으로 조금 더 많이 알려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물어올 수밖에!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언어, 관념, 관습, 예술, 의례 등이있다. 그 문화에는 당연히 음식도 포함이 되는데, 해외에서 생활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중국 음식점과 일본 음식점이 한국 음식점에 비해 그 수가 월등히 많았다. 외식을 할 때에도 외국 친구들에게 “동양 음식 먹을까?”라고 말하면 “어디! 일식집? 혹은 차이니즈 레스토랑?” 이라고 말한다.

        

“한국 음식점으로 갈까?”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국 음식을 예전에 먹어 본 사람을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한국 문화가 중국이나 일본만큼 알려지지 않았을까?


미술 역사를 되짚어보면 한국이 세계 앞에 자신을 알릴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된 중요한 몇몇 사건들이 있었다.

             

1844년 프랑스에서 처음 개최된 국제 박람회 형식의 월드페어(World fair)에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처럼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아서? 혹은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 때문에? 아니면 1592년 임진왜란 때문에 주옥 같은 도자기 장인들을 일본에 도둑맞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그 이후 일본에게 빼앗겨 동양문화의 판도가 일본에게 기울었기 때문에? 물론 국제 엑스포가 처음 생겨났을 때 대한제국이 쇄국정책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판세를 뒤집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것의 시작은 위에 나열된 것 중 어떠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의 힌트를 주자면,

인쇄술!


맞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바로 그때 1440년도부터이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기술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보다 200년이나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직지심경’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더 많이 알고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이 세계에 먼저 알려지지 못했을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보다 쉽게 보급 될수 있도록 도왔던 반면, 고려 및 조선의 인쇄술은 오로지 책을 읽을 줄 아는 승려들 및 일부 지배층만을 위한 것이었다.


해외에서 친구들이 구텐베르크에 대해 이야기를 해 올 때면 “모르는 소리! 우리나라는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서 그런 기술이 있었어!” 라고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작은 질문 하나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알게 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기술이 독일보다 더 앞서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고 나니 이렇게 부끄러울 데가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성경 보급으로 인해 독일 사람 중 25%, 즉 한 가족당 적어도 한 사람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 초기의 인쇄와 출판은 오로지 국가가 그 기술을 독점했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도무지 책을 읽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조선의 인쇄문화는 국가가 독점하였다. 이것은 중국, 일본과도 다른 조선만의 특징이다. 중국은 13세기 이미 민간 출판업자와 서적상이 등장했고, 18세기에는 베이징에 류리창 같은 거대한서적 시장이 출현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인쇄문화가 미미했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약탈해간 금속활자와 서적들을 밑천 삼아 도쿠가와 막부 이후 출판업이 급속도로 발전한다. 1710년께 서점·출판업자가 359개에 이르렀다.”

조선의 금속활자는 왜세상을 못 바꿨나 <한겨레> 2014/1/5 에서 발췌


독일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활자 기술은 문맹의 수 혹은 국민의 계몽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한글이 나오기 전까지 조선은 양반 지배층들에게만 책을 읽을 특권을 주었고 지배계급이었던 사대부는 국가가 발행하는 책으로 학문을 수양할 수 있었지만 백성들과 여성들에게 ‘충’, ‘효’, ‘열’ 같이“강자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를 주입시켰기 때문에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명확했다. 그리고 그 구분선은 안타깝게도 유교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14세기 이미 독일인들은 적은 숫자의 알파벳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조선 시대 대부분의 서민들은 1,000자 이상 되는 기본적인 한문을 읽고 쓰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446년이 되어서야 세종대왕은 사대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글을 알 수 없었던 여자나 아이들을 포함하여 서민들에게 배우기 어려운 한자가 아닌 순수 우리나라의 글자인 한글을 쉽게 읽거나 쓸 수 있도록 보급하였다. 홍문관이라는 국가도서관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도서관은 출입이 허락된 관료들만 접근할 수 있었고 한글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한 세종대왕의 뜻에도 불구하고 조선 최초의 서점은 19세기가 되어서야 생겨났다.


권력을 가진 조선의 지배층들은 서민들이 발언권을 가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읽고 쓰지 못했던 서민들이 우리의 문화를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우리의 문화를 글로 전파하지 못했다. 그것이 세계인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에 관심이 없었던 첫 번째 이유이다. 따라서 한국 문화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더욱 감추어 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한국을 잘 모르는 세계인들의 눈에는 우리 문화가 왜곡될 수 밖에 없었으며, 두 번째는 위와 같은 이유로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한국 문화 및 예술품들에 대해 배울 수 없었다.

             

이 모든것의 시작은 바로 한국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의식 수준과 지식의 정도가 바로 국력인데, 우리 선조들의 문맹 퇴치가 다른 선진국 나라보다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국력은 아직도 매우 약하다. 그리고 지배층들은 여전히 서민들이 발언권을 가지는 것을 무서워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나라의 국력이 계속 약해지게 만든다.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글 머리에 있는 “너는 중국사람이니, 일본사람이니?” 라고 나를 비롯하여 여러 한국인들이 해외에 나가면 같은 질문을 받는다. 혹은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국가는 위안부의 문제처럼 우리의 아픈 역사를 돈을 받고 파는 일도 생겨나게 되었다.


국력에 관해 또 다른 면에서 알게 된 것은 임진왜란에 대한 것이다. 16세기에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지, 만약 왜 일어났는지 알았다면 ‘진짜? 고작 그까짓 것 때문에?’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화, 예술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큰 파란을 불러 일으킨다.


일본은 차를 마시는 문화가 있는데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도예가가 많이 없었고, 당연히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도 없었다. 차 사발로 일어난 전쟁이라는 임진왜란의 중심에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끌려갔던 ‘이삼평’이라는 도예 장인이 있었다.


타의에 의해 일본으로 잡혀갔지만 전쟁 이후에도 도망치지 않고 계속 일본에서 도예 장인로 살아간 이삼평은 전쟁 이후 조선으로 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도예가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조선에서의 도공은 누구나 무시하는 천민이었지만, 일본에서의 도공은 도자기의 수요에 맞게 공급을 해 주고 있는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주는 위대한 도예 장인으로 대우했고 끊임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16세기에 한국의 도자기 장인으로부터 건너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유럽인들이 일찍 알았더라면 어쩌면 그 영광은 한국인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력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유럽인들이 일본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 한국 예술에 먼저 더 열광했다면 지금 외국에서 한국인들이 받는 차별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쇄국정책이 지금 시대의 국력으로 이어질 것을 알았다면 우리의 선조들은 후손들을 위해 조금은 현명하게 선택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19세기에 처음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던 일본 문화, 그 중에서도 도자기(일본 도자기의 뿌리는 한국이다.)와 그것의 포장지였던 판화가 박람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고 인상파 화가 모네가 일본 미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일어난 미술운동에도 일본문화가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모네와 함께 했던 인상파 모두가 일본 문화를 사랑하는 열풍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 이후에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Art and craft movement)’과 ‘아르누보(Art Nouveau)’ 등 다양한 미술 운동들이 일본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일본 문화가 세계 미술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있다.


다른 나라로부터 약탈한 도자기 기술 하나로 시작하여 일본의 문화와 국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미노처럼 번지게 되어 이처럼 일본은 큼직큼직한 많은 미술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가 국력이 약해진 이유들이 많았겠지만 앞으로 우리가 긍정적인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오히려 한국에 대해 알릴 수 있는 잠재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지금의 한국 문화 및 예술은 오히려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우리의 언어로 우리나라의 예술이나 문화에 대해 알수 있는 자료가 넘쳐 나지만, 다른 나라에는 영어로 혹은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한국 관련 책들, 예술 혹은 미술 책들이 많이 없기 때문에 바로 그 시장을 우리가 개척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보다 많은 세계인들이 이전보다 한국에 대해 정확하게 알수 있고 우리 문화를 공부하고 싶어하며 흥미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다행히도 싸이(PSY)의 ‘강남스타일’이 한류 바람의 물고를 터준 이후로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뉴욕의 중심부타임스퀘어(Time Sq 42 street)에서 2013년 새해에 싸이가 무한도전 멤버들과 함께 아주 열정적인 새해 댄스 쇼를 펼쳐 준 덕분에 그날 새벽 4시가 넘도록 뉴욕 지하철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말춤을 추고 다니는 진귀한 광경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2012년 5 대 팝 문화 중 4위를 차지한 PSY  | 뉴욕 출근길 지하철 입구에서 받은 메트로 신문  

4위. PSY takes over the world with "Gangnam Style."  (신문 본문 내용 중 네모 부분)

4위 "강남 스타일"로 세계를 접수한 싸이


세계에 훌륭한 한국 문화 및 예술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한국인들의 의식부터 계몽하여 우리의 것을 잘 지키고 보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잘 지켜내지 못하면 다른 나라에 빼앗겨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싸이가 잘 만들어 낸 음악이 혹시 다른 나라사람에 의해 표절이 되고 그래서 싸이보다 더 유명해진다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싸이가 만들어낸 노력과 열정을 고스란히 주어버리는 일이 된다. 이제까지 빼앗긴 문화는 인쇄술의 최초 명성이라든지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의 예술혼이라든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것이몇 배 더 부풀려져서 매우 훌륭하게 잘 포장되어 세상에 나왔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잘 지켜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청춘들부터 잘 보살펴야 한다. 조선사람이 그들의 도공들에게 했던 대우는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더 이상 그들이 조선에서 살고 싶지 않도록 밀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한국의 청춘들은 지옥같은 한국에서 노예 같은 삶을 뒤로하고 다른 나라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근로자들은 근무시간에는 최선을 다 해 일하되 업무가 끝난 이후에는 관리자들은 그들을 가족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 행여나 야근이 필요할 경우에는 반드시 야근 수당을 눈치 보지 않고 받는것이 올바른 문화로 바꿔나가야 한다. 어처구니 없는 우리 나라의 직장문화 부터 당장 뜯어 고치고 한국의 근로환경을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젊은 친구들은 계속 이 나라를 빠져나갈 고민만 하게 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예술인 혹은 디자이너들에게 의례적으로 요구하는 열정페이가 우리의 청년들에게 계속된다면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의 도공 이삼평처럼 우리의 잘 숙련된 기술직 및 예술인들이 해외로 빠져나갈 테고 그로 인해 국력이 약해지고 많은 손실이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예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대우를 해 줘야 하고 가치 있는 예술품들을 잘 지켜내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하면 빼앗긴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우리의 음식 ‘김치’와 ‘비빔밥’, 중국이 주시하고 있는 -한국인의 한이 서려 있는- 우리의 ‘아리랑’ 가락, 제주도의 해녀 역사등등이다. 양 옆의 나라들이 이러한 한국의 문화들을 아무도 모르게 흡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한국 청년들이 곧 문화이다. 국력이 계속 약해지는것을 보고만 계실 기성세대들에게 “우리의 문화가 또 빼앗기는 모습을 계속 보고만 계실건가요?” 라고 묻고 싶다.


세계에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 아니, 사실은 한국의 국력을 키우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한데, 바로 그 나라의 문화를 아는것과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가장 쉬운 예로 전 세계에 있는사람들이 현재 K-pop에 열광하고 그것 때문에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근무할 때 출근을 하는 버스 안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현지 미국인 학생을 볼 수 있었다.

      

“어?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네요? 재미있어요?”


“네, 한국어가 너무 재미있어!”
(아직 완벽하지 않아서 반말도 가끔 나온다.)


“무엇 때문에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나, 나중에 홍대에 갈 거예요!”


“네? 홍대를 알아요?”


“네, 나는 홍대에 있는 인디밴드를 좋아해요!”


신기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도 사실 홍대에 있는 인디밴드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나보다 그들이 우리의 음악을 더 좋아하고 더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와 같이 한국에 외국인들이 많이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또 좋은 문화들을 계속 배워 간다면 그들이 그들의 나라에 돌아가 우리나라를 더욱 알릴 수 있는 외교사절단 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관광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나라에 더욱 많은 외국인들이 방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다양성이 인정되어 다름을 받아들이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는다면 어처구니 없는 우리의 직장문화도 언젠가는 달라지게되지 않을까?


만민이 평등하지 않았고 국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그 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 우리의 과오를 고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만들어 낸 과거로부터 배우고 우리가 앞으로 국력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더불어 우리의 태도 또한 살펴본다면 좋겠다. 행여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 남의 나라의 문화재에 낙서를 하고 온 기억은 없는지,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려고 했는지, 올바른 역사책을 편찬하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일을 포함하여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올바른 눈으로 바라보고 공부해 보려고는 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국가에 대한 도덕적 신념을 돈을 받고 팔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외국인은 어짜피 잘 모른다며 태극기를 거꾸로 달아 본적은 없는지, 혹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여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등등 우리의 마음가짐부터 돌아보고 국력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분야에서 각자가 맡은 일을 올바르게 하게 된다면 어느새 우리나라는 조금 더 강해져 있지 않을까?


더불어 언젠가 처음 보는 외국친구가 나에게 “너는 한국, 일본,중국 어디에서 왔니?” 혹은 더욱 정확하게 “너는 아시아 어디에서왔니?” 라고 질문하는 날을 기다려 본다.



*이 글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 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가공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수정일 2020년 5월
 

*아쉽게도 최근 종이책  전자책 출판 계약이 종료되었습니다조만간 다시 편집하여 도서 전문을 업로드해서 많은 분들이 자유롭게 다운로드 받아 읽으실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이전 12화 멋진여자는 여행을 사랑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