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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이해 Jan 03. 2016

멋진여자는 여행을 사랑한다.

<멋진여자가 되려면> Chapter 9

9. 멋진여자는 여행을 사랑한다.


멋이 없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법


불안한 비정규직, 15년째 오르지 않는 근로자들의 평균 월급, 2015년 현재 기준 OECD 국가 중 연간 근무시간 세계 1위(세계일보 2016년 2월 10일기준), OECD 국가 중 자살률 세계 1위, 야근과 회식의 압박, 도무지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는 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 내 친구들에게 그동안 수 많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국에서 근무를 하다가 미국에서 다시 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한 뒤 해외에서 근무를 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인으로 살아야 했던 나는 도무지 행복하지 않았다. 매 순간순간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했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매번 위로했다. 지나고 보니 친구들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너무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


이렇게 멋 대가리 없는 한국을
나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해외에서 살게 되면 누구나 그렇듯 애국자가 된다. 나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나의 조국이 항상 그리웠고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운 것 처럼 중국과 일본의 압박 속에서도 언제나 열심히 견디어 준 길고 찬란한 우리의 역사가 자랑스러웠다.


외국에서 지낼 때에도 3.1절이 되면 어려운 시기에 우리나라를 목숨 바쳐 지켜내신 독립 운동가들 덕분에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우리의 언어와 문화유산을 지켜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학교를 다닐 때에도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친구들과 교수님들께 내 나라의 문화를 더 많이 알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앞 장에서 잠시 다루었지만 언젠가 학교에서 미술 역사를 배울 때 동양의 미술 부분을 다루시면서 중국, 일본의 미술은 심도 있게 다루는 반면 한국의 미술은 쏙 빼놓고 진행하셨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의 방에 찾아가 궁금중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똑똑똑!)


"교수님, 안녕하세요?!"


"Hey, what's going on? any help?"

"어쩐일이야? 어떻게 도와줄까?"


"다름이 아니라 오늘 하셨던 수업에 대해 질문이 있어서요."


"Cool! I am ready to listen. Feel free to talk to me."

"좋아, 이야기해봐!"


"오늘 교수님께서 동양의 미술품에 대해  이야기하셔서 수업 시작할 때 신났어요."


"맞아! 수업 어땠니?"


"기대 많이 했어요.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동양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중국이랑 일본의 미술품만 이야기하시고 저희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잊으셨어요. 혹시 어떤 문제라도 있었나요?"


"아.... 그렇지. 네가 어디에서 왔다고 했더라?"


"한국이요."


"음..."


코트니 교수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그 이후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나도 한국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공부 할 수 있는 한국 미술 자료가 많이 없단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동양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중국과 일본이 전부였어. 나도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


말씀 해 주신대로 중국과 일본의 미술 서적은 도서관에 많아 연구할 것들이 많은데 비해 한국 미술은 아직도 숨겨져 있다고 하셨다. 교수님과의 대화를 마친 후 한국 미술 서적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확인을 해 본 결과 한국 미술에 대한 책은 10권도 되지 않았고 나는 좌절스러운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어?"


"어, 티나..."

아니, 별거 아니야.

오늘 코트니 교수님 수업 들었지?"


"응, 동양미술! 일본, 중국 미술품 아주 판타스틱~!"


"수업 중에 뭐 이상한 거 없었어?"


"글쎄?! 나는 잘 모르겠던데"


"동양미술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수업에 들어갔는데 한국 미술만 없었어." (한숨)


"아! 맞다~그렇네?!"


"그래서 교수님께 찾아갔는데 교수님이 하신 말씀은 영문으로 된 한국 미술책이 많이 없어서 학생들에게는 중국과 일본 미술품만 대표적으로 가르치신다고 했어."


"그래서 많이 속상했구나."


"나는 국력이 이런데서 표시가 난다고 생각해. 내가 학교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전에 조사해 봤는데 우리 학교에 있는 가장 많은 유학생 수는 중국 학생이고 다음에 한국, 그 다음이 일본인데 학교 학생들이나 교수님들은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지만 학교에서는 한국 학생들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어.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 학생들에게는 그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나 질문도 많고 엄청 잘 대해주시는걸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그게 국력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렇게 미술품에서까지 표시가 날 줄은 몰랐어. 뭐 좋은 방법 없을까?"


"흠! let me think....

wait! I have a good idea!"

잠깐! 좋은 방법 있다!


티나는 가방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찾기 시작했다.


"이거 학과 복도에 걸려있길래 관심 있어서 가지고 와 봤어. 이거 본 적 있어?"


"이게 뭐야?"


학과 복도마다 붙어있었던 미술 역사 심포지움 call for paper 였다. 나도 수업을 들으면서 지나다니다가 많이 본 적이 있던 미술학회 발행물이었는데 두어달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갔던 기억이 있었다.  


"나 여기 지원 할꺼야."


티나가 말했다.


"진짜? 잘 되었으면 좋겠다."


"너도 해봐. 아까 말한 그거."


"뭐?!"


"아까 그거. 한국 미술 말이야. 사람들이 모르면 알게 해야지."


"내가?!

Native도 아닌 내가 사람들 앞에 나가서 발표하라고? 게다가 우리 졸업반이야.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시간이 될까?"


"만약에 내가 도와주면 어때?!

나도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


티나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나는 졸업 작품 전시회 대신에 미술 역사 심포지움 학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call for paper에 지원해보기로 했고 지원된 글이 당선이 되면 나는 내 학교가 속해있는 나의 학교 교수님들을 포함하여 같은 주의 다른 학교의 여러 미술 지도 교수들, 및 미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조국의 문화와 예술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생기는 거였다.


마지막 학기가 매우 고되고 힘들었지만 사실은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수 많은 과제와 아르바이트로 내 손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더 이상 손가락을 움직일 힘이 없어 유화 붓과 내 손을 합체시켜 투명 테이프로 돌돌 감아 손을 고정시켜서 그림을 그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되었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1/8이 한국 사람인 나의 룸메이트 티나는 한국인이 먹는 음식과 나의 문화에 항상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찾은 모든 자료들을 수집 해 내가 쓴 글이 당선이 될 수 있도록 글을 고치고 다듬고 올바른 영어 표현으로 수정하는 모든 절차들을 대부분 티나가 도와주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이런 기회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내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내 글은 call for paper에 당선이 되었다. 그 당시의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겠어!

한국이 얼마나 훌륭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지 꼭 알리겠어!


라는 자부심과 내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글이 당선이 되었지만 아직 보충해야 할 자료는 많았다. 교수님께서 말씀 하셨던 것 처럼 영문으로 된 데이터는 당연히 많이 없었다. 말씀해 주신 대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는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는 미국 및 한국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내가 속해있던 주의 유명한 학교 도서관 별로 중국, 일본, 한국 미술 책들의 비율이 얼마인지도 조사했다.


내 자신 자체가 한국인이고 나는 한글로 많은 자료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참고할 수 있는 문헌 및 공식적인 자료는 여전히 영문 자료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미국 시간으로 새벽시간 도움을 청하려 문화 체육 관광부에 전화를 걸어 여러차례 공식 요청을 했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수 많은 학생 중 한국을 알리고 싶어 하는 아무런 힘도 없는 유학생의 요청을 당연히 들어 줄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학교 안에 국제 문제를 다루는 부서에서 이종관 재외 국민 영사 대사를 초청하기로 한 것을 본 나는 '왜 한국 통일이  중요한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실 거라는 소식을 듣고 어쩌면 그분께서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것을 도와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강연에 참석했고 강연이 끝난 후 나는 한국 영사에게 개인적으로 잠깐 동안 나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자료가 없어서 내가 미국에서 한국을 알리는 이 중요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더니 지정된 날짜까지 공식 영문 책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분도 많은 공무원들 중 한 사람 이겠거니 하며 잊어버렸지만 이 대사는 진짜로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우편물을 보내왔고 약속을 지켜 준 덕분에 수많은 데이터가 모였다.


그중 간추려서 영문으로 20페이지가 나오게 되었는데 제목을 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내게 모든 글을 읽어보신 코트니 교수님은 심포지움에 발표될 제목을 정하는 것을 도와주셨다.



Korean Culture; still hidden and distorted by mass media.
<대중매체에 가려지고 왜곡된 한국문화>


내가 심포지움에서 발표 한 내용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금속 활자 직지심경,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찻사발로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과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의 도공 이야기, 그래서 일본이 도자기 강국이 된 이야기, 19세기 유럽에서 열린 국제 Expo에서 일본의 도자기에 쌓여있던 판화 포장지와 Japonism.


*Japonism 쟈포니즘

19 세기 중후반 유럽에서 유행하던 일본풍의 사조를 지칭하는 말로써 필립 뷰르트(1830-90)가 최초로 사용하였다. 이는 단순한 “일본 취미(Japoneserie)”에 그치지 않는 일본 취미를 예술 안에서 살려내고자 하는 새로운 미술운동 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 유럽에서 30여 년 이상 지속적으로 일본을 동경하고 선호한 일본 문화에의 심취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서양의 미학적 관점에 변화를 주게 된 새로운 미술사적 영향으로  평가받는다.


그 외에도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 마네가 자신의 예술적 방향이 바로 그 Japonism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된 이야기, 우리 선조들이 도공들을 천민이 아닌 예술가로 존중하고 대우해 주었다면 다시 돌아왔을 우리의 도공의 후손이 한국에 올 수 있었지만 오지 않고 계속 일본에 남아 일본의 도자기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 아름다운 도자기의 원천은 사실은 한국인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들을 전했다. 영국에 왕립 미술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어진화사를 그리는 도화서가 있었다 등의 발표였다.


도자기 이야기를 많이 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요소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문화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아주 작고 사소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공을 너무 하대하지 않고 예술가로 대해 주었더라면, 그래서 예술품을 잘 이어받아 우리나라도 19세기 영국이나 프랑스가 주최했던 만국박람회나 엑스포에 도자기나 우리 미술품을 들고 우리나라 이름으로 당당하게 미리부터 참가했었더라면 인상주의 화가 마네의 취미와 예술적 방향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참석했던 교수님 중 도자기술을 가르치는 세라믹 교수가 한국의 김치 옹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도자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외에도 한국의 오방색, 그리고 한복 등 여러 분야를 통해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의 국보급 미술품 사진들을 골라왔다. 교수님께서 자료가 없어 학생들에게 전달해 주지 못하신 그 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수업의 Art history 교수님이자 심포지움의 주최자였던 코트니 데이비스(Courtney Davis) 교수님, 그리고 티나의 도움으로 나는 내가 나고 자란 나라 '한국'의 문화와 미술 및  문화유산을 소개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당시 사용했던 포스터 중 일부



나는 심포지움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끝날 때 까지도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참고한 모든 영문으로 된 공식 자료들은 심포지움이 끝난 후 졸업을 마치고 코트니 교수님께 쓰일 수 있도록 선물로 학교에 기증했다.


이러한 내가 한국에 다시 왔을 때 내가 역으로 받은 문화 충격은 실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길을 가다 상대방 쪽에서 먼저 나와 심하게 부딪혔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없이 오히려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가던 길을 간다. 외국에 살면서 인터넷 기사를 통해 보았던 한국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은 내가 도무지 체감할 수 없었다. 여전히 수당 없이 야근을 하라는 압박을 많이 받았고, 일주일 이상의 휴가라도 내려면 눈치가 보이거나 차라리 퇴직이 최선이고, 윗사람들은 여전히 직원들을 노예 다루듯 부렸다.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말 보다 동방 민폐지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으면서 한 손에는 담배를 쥐고 걸어가며 길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없는 이 나라가 도대체 뭐가 좋다고  그때 수 많은 자료들을 모아가며 잠도 못 자고 발표 준비를 했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내 친구들과 교수님에게 ‘한국이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은 나라예요! 아름다운 나라예요~ 한번 놀러 오세요!’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급여 수준은 15년 전과 같았으며 유학을 하고 고생한 보람이 전혀 없을 만큼 급여가 그대로였던 반면 물가는 치솟았다.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어른이 되었음에도 스스로 결정 혹은 판단하지 못하고 마마 걸, 마마 보이를 많이 양성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재정적이나 정신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없게 만드는 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서 독립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동산의 보증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고 유교사상이 뿌리 박힌 사람들과 대화할 때 정말 화병이 나 버릴 것 같았다.


한국에 살고 있는 내 외국 친구들이 나보다 내 병명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역문화 충격(Reverse culture shock) 이 단어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아직도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앞 장에 언급했지만 마치 어릴 때 만났던 절친과 오랜 세월 어쩔 수 없이 각자의 삶에 바빠 떨어졌다가 다시 만났는데 살아온 세월이 달라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게 되고 생각을 공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슬픈 상황을 만나는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내가 미국 사람들에게 나눈 한국은 모두 다 옛 것들이었다. 현재의 한국은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잘 하고 있지 않은 정치인들,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썩어버린 교육계, 어느 정부든 항상 있는 부정과 부패의 흔적들 그리고 비리가 가득한 한국, 한국에 와 보니 일을 해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고 세월호 사건 이후 불평과 불만만 늘어가던 어느 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터져버릴 것 같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갑자기 휴가를 냈고 나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채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한 것 이라고는 제주도 행 왕복 비행기 티켓과 일주일 동안 지낼 숙소만 예약하고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멋이 없는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방법 - 여행
계획 없이 갔던 제주도


비행기가 이륙하고 모든 건물들이 성냥갑처럼 작아졌을 때 비로소 모든것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드디어 떠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유다!


김포공항에서 미리 받아놓은 제주도 지도가 펼쳐저 있는 작은 안내 종이에 있는 설명들을 비행기안에서 읽어내려갔다. 제주도는 서울과 달리 흥미로운 곳이 정말 많아 보였다. 비행기의 작은 창에서 만난 제주도의 모습은 제각기 다른 제주도의 아름다운 가을색으로 조화가 이루어진 제주의 텃밭들이 예쁜 조각보처럼 한데 어우러져 환상의 조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Rural Scene | JM Botham | South Africa


비행기 안이라서 전자기기를 켤 수 없었고 준비되지 않아서 찍지 못했지만 나의 눈에 담아온 제주는 이러한 느낌이었다. (제주도 사진을 넣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제주의 똑같은 느낌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같은 사진을 찍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제주에서 가 보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생태 체험장, 신기한 것들이 많은 박물관,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감귤 체험장 등등.. 여기도 가야지 저기도 가봐야지 체크만 해 놓고 숙소로 가서 짐을 풀었다. 분명 서귀포 항에 도착했을 때는 쨍쨍 햇빛이 좋았는데 숙소에 짐을 풀고 보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고 갑자기 비행기에서 계획한 모든 곳들을 살펴보니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았다.


삭막한 도시에서 떠나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이 밀려왔고 진심으로 한국에 관한 모든 것에 지쳐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무기력증이 여기까지 쫒아 와서 내 어깨에 찰싹 붙어 도무지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 와서 관광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냥 무작정 쉬기로 했다. 나는 여행기간 동안 보통의 관광객들이 다니는 경로로 한 걸음도 가지 않았다. 대신 머물던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중섭 거리와 미술관이 있는 것만 우연히 발견했던 터라 그곳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이중섭은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책에서 많이 접했던 화가였고 미국에서도 한국 작가들을 다룰 때 워낙 그림이 유명해서 한국의 고대 미술품은 전혀 다루지 않아도 현대미술 중 이중섭, 백남준 정도는 미국 대학 미술 교과서에서도 종종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그림을 그린 작가였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 사람과 생활에 대해서는 이곳 제주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중섭과 그의 아내 남덕(마사코)

*작가 이중섭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현재 제주도 서귀포 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였다.


이중섭의 생애는 살아서는 생활이 궁핍했으나 타계 후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알아봐 주고 생전에 수 많은 그림을 남기고 떠났다. 1952년 가난을 견디지 못해 아내와 두 아들을 처가인 일본으로  떠나보낸 후 아내와의 편지 왕래가 시작되는데 1층에는 대부분 간단한 이중섭의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는 반면 나는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가 전시된 2층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남편과 함께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뿐 아니라 아내가 친정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숙소로 터덜터덜 내려오면서 든 생각은 나의 미술에 대한 오랜 열정을 이제 보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서양화가 이중섭은 주권을 잃은 조국과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친구의 아버지이자 그의 스승인 임용련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그림 공부를 했고 이중섭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이중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중 아내를 만났고 전쟁 통에 귀국했지만 아내가 곧 한국으로 따라왔고 결혼했다.


피난길로 통영, 제주를 택해서 제주에서 살았지만 밥벌이가 좋지 않아 식구들이 많이 굶었고 맨 밥이나 게등 잡아먹고살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게들에게 미안해서 게 그림을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이들은 일본에 건너가서도 아버지와 게를 잡고 놀던 행복했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운 제주도 풍경 | 이중섭, 1954

                    

물고기와 아이들 | 이중섭, 1950


이중섭은 이 순간을 은지화에 담아냈다. 미술 재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담뱃갑 은박지 에라도 그림을 그려야 했던 예술 혼과 생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중섭의 은지화다. 친근한 미감을 자극하는 은박지 그림은 현재 뉴욕 현대 미술관이 소장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독특한 표현 방식이다. 그림으로 삶을 완성한 화가 이중섭은 지독한 가난으로 가족과 이별한 뒤 음주와 정신 질환에 시달리다 짧은 생애를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여전히 아름답고 따뜻하다.


내가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부모님께 나의 계획을 말씀드리던 날, 미술을 하면 배고프다고 엄마는 몹시 반대를 하셨다. 어디에서 난 근본 없는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 늦은 나이 유학을 떠나면서 나는 너무나 당당하게도,


엄마!
미술이 돈이 되는 걸 보여 드릴게!

내가 보여 줄게


라고 말하며 한국을 떠났다. 내가 입학을 했을 당시 나의 친한 친구가 이미 같은 학교의 미대  졸업반이였고 그 친구가 우리 학교에서는 한국인 졸업생 1호, 내가 우리 학교에서 한국인  미대생으로는 두 번째였다. 학업을 시작하는 나에게 졸업반 1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학 생활이 그렇게 즐거운 건 아니야. 맨날 수업 가고 과제도 많은데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계속 고된 일 하니까 다리는 퉁퉁 붓고 일 마치면 그제야 과제하다가 새벽에나 잠이 들어. 괜찮겠어?”


“야! 너도 했는데! 걱정 마, 할 수 있어.”


라고 말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친구에게 그 말을 너무 쉽게 해버렸다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나는 한국과 다른 대학 교과 과정에 정말 힘들어서 죽을  뻔했다. 그렇지만 내가 뱉은 말 한마디 미술이 돈이 되는 것을 보여 줄게!라는 어처구니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버티고 싶었고 버텨야만 했다.


한국의 미술, 디자인 산업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훌륭하고 좋지만 업무 환경은 그다지 좋지 않은 이 나라에서 열정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이것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던 시기에 제주 여행에서 마주한 이중섭의 아내 마사코는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아내인 마사코가 얼마나 이중섭을 걱정하고 전전 긍긍하며 살았는지 생활고 때문에 얼마나 친정에 신세를 지고 살았는지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편지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한 집의 가장인 이중섭도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아이들과 아내를 생활고에 일본으로 보내 놓고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중섭의 대표작은 '소'인데 묵묵히 일만 하는 우리의 국민들이 소와 닮아 소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여러 종류의 그가 그려낸 소 그림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힘차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림은 그다지 좋은 상품이 되지 못한다. 전쟁 통에 누가 그림을 사려고 했을까?


흰 소 | 이중섭 1954

전쟁 이후에도 한국사람들은 계속 일만 해서 그를 대표하는 한국인의 모습으로 소를 그렸다고 했는데 지금도 살아계셨다면 그분은 아직도 한국인의 모습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계속 소를 그리셨을까?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이제는 한국인들이 일만 하지 말고 대표적인 모습이 조금 행복하게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어떤 대표적인 모습으로 그려주실까?


이중섭의 아내는 아이들 건강 문제로 남편을 두고 먼저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홀로 남겨둔 이중섭에 대한 걱정까지 놓고 가지는 못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의 소식을 알지 못해 남편이 어디 있는지 속을 많이 태웠다. 그 사이 이중섭은 아내의 편지에 대한 답장 하나 없이 거식증을 앓아 왔고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탈출하기도 했으니 한 집안의 가장으로 매우 힘들었을 것 같다.


고흐처럼 짧은 시기에 많은 그림을 남기고 전설처럼 사라진 이중섭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아내는 혼자 있는 남편이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여러 편지를 남겼지만 결국 이중섭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아무도 지켜보는 이가 없는 가운데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지금이야 이중섭 거리가 생겨나고 그의 생가도 보존되어있고 박물관도 세워져 있지만 사람이 죽고 나서 그런 이름을 남기면 뭐하나 싶다. 그걸 보면서 나는 남덕 (마사코의 한국 이름)처럼 살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했다.


혹시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이들에게 배를 곪게 하는 일은 없어야지, 나를 잘 키워주신 부모님들께 걱정과 재정적인 부담을 드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들 뿐이었다. 전쟁 때문에 한국인 국적을 가진 이중섭만 비자 문제로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어 홀로 한국에 남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떠한 순간에라도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것은 비극을 낳는다.


내 열정보다는 앞으로 나의 내면을 찾을 수 있도록 나를 좀 더 아껴주도록 하면서 동시에 무모하게 살지는 말아야지 라는 큰 깨달음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조금 더 나를 사랑하도록 배운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또 다른 점도 있다.


그가 가진 삶에 비해 그의 그림은 항상 행복했다. 가족들과 제주도 서귀포의 자구리 지역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담은 그림들이 떠오른다.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그림을 보고 오니 나도 힘이 솟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무리 힘든 순간이어도 긍정적인 생각을 얻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중섭이 아내에게 주었던 편지와 삽화


바로 여행이 주는 선물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중섭의 삶. 나의 무기력증으로 인해 발걸음이 안내해준 서귀포 항 자구리라는 지역이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다음날은 제주도의 동쪽 지역으로 떠났는데 계획 없이 떠나도 후회 없는 여행을 하고 올 수 있었다. 어느 곳을 가던지 상관없이 제주도의 맑은 하늘과 그동안 업무에 시달려 10년 넘게 제대로 즐겨 보지 못한 바다를 한 없이 볼 수 있었던 해수욕장, 어깨의 살이 벗겨질 만큼 따가웠던 가을볕, 해변을 따라 달리던 나와 자전거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있었던 날, 나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아도 되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마구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고 너무 즐거웠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창피하지 않았다. 설사 누가 봤다고 하더라도 미소 가득 두 팔 벌려 소리 지르는 한 여인이 기분이 좋아서 그랬으리라 이해해 주었기를 바란다. 그 날이 바로 내 인생에  손꼽히는 가장 행복한 날들 중 하나였다.


바닷가에서도 근처 오름의 정자에서도 가고 싶은 모든 곳 들을 자전거와 함께했다. 마지막 날 까지도 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장소만 골라 계획 없이 다녔지만 어디를 가든 청명한 가을 날씨와 풍경이 나를 반겨주었고 어느 곳을 가던지 아름다웠던 제주도는 나를 무척이나 행복하게 했다.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그동안의 나는 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살기 불편한 곳인지 불평만 했다. 그런데 여행을 해보니 아직 다녀보지 못한 아름다운 곳들이 많은데 나는 왜 이런 한국에 화만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이 아직 정치적으로나 역사적,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점들이 정말 많지만 여행하는 기간 만큼은 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눈에 담아오고 싶었다. 내가 한국의 싫은 점들만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다시 이 한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직 나의 외국 친구들에게 전체적인 관점으로의 '한국이 정말 멋진 곳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경치, 한국의 멋, 한국으로의 여행은 추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친구와 함께 했던 길거리 맛 투어 부산여행
사진기만 달랑 들고 홀로 떠난 동해여행

교통은 불편했지만 고즈넉했던 전주여행

한국의 세느강이라 불리는 진주의 남강과 밤에 더 아름다운 진주성

그리고 내가 앞으로 만나게 될 수 많은 나의 여행들


내 인생의 기름칠, 여행!

어떠한 여행이든 여행은 항상 깨닮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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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정일 2020년 5월
 

*아쉽게도 최근 종이책  전자책 출판 계약이 종료되었습니다조만간 다시 편집하여 도서 전문을 업로드해서 많은 분들이 자유롭게 다운로드 받아 읽으실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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