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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이해 Jan 01. 2016

멋진여자는 좋은 친구가 있다.

<멋진여자가 되려면> Chapter 8

8. 멋진여자는 좋은 친구가 있다.


너는 알지 티나?

                

“내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코트니 교수님이 미술 역사수업을 해 주실 때 너도 같은 수업에 함께 있었고 중국이랑 일본 미술품만 다루고 한국 미술품에 대해 아무 말씀 없으셨을 때 내가 수업 마치고 교수님한테 갔었잖아.”

“그랬지! 그것 때문에 네가 졸업 작품전을 여는 대신에 미술역사 심포지움에서 한국 미술품에 대해서 발표했잖아.”


“맞아. 내가 그걸 한 이유는 우리나라도 중국이나 일본만큼 위대한 문화유산도 많고 아직 한국에 대해 모르는 여기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꼭 알리고 싶어서였어. 내가 나고 자란 나라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외세의 침략에도 오래도록 버티면서 지켜온 그 문화유산들 말이야.”

              

“응. 네가 문서 준비하는 것을 돕고, 문서를 수정하면서 나도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어. 그리고 신기한 이야기도 있어! 엄마랑 이야기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나도 1/8이 한국 사람이라는걸 알았거든.”

              

“응? What?!
네가 한국 사람이라고? 너 일본계 미국인(Half Japanese) 아니었어?

아빠는 미국 사람이지만 엄마는 일본사람이잖아.”

너랑 룸메이트로 지내면서 너희 나라와 너에 대해 전화로 엄마랑 이야기했어. 엄마가 할머니께 너에 대해 말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지금에서야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거야!”

              

“헉! 대박. 그래서 네가 그렇게 한국 음식을 좋아했구나! 그나저나 왜 이제야 말씀하셨지?”

               

“할머니가 어릴 적 일본에서 사셨을 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차별도 많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인인 걸 숨길 수밖에 없었대.”

               

“아..., 그랬구나. 근데 정말 신기하다! 너도 한국인이라고?!”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같은 한국인의 피가흐르는 친구를 룸메이트로 두고 있었다니!

              

티나를 만나기 1년 전 학교에서 같은 전공수업을 듣는 조용한 친구를 본 적이 있었다. 키는 나보다 훨씬 크고 일본어로 코카콜라라고 쓰여진 빨간색 커다란 박스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 아이는 한국인인 나보다 더 수줍고 낯을 가리는 친구였고 10명이 채 되지 않던 수업에서 말 없이 수업만 듣던 아이였다.

        

한 학기 내내 조용히 지내던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 학기를 마쳤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이 되면서 나는 유학 생활 마지막 1년을 마무리하면서 머물고 싶은 꽤 괜찮은 집을 구했고 드디어 햇볕이 잘 드는 좋은 집을 계약했다. 학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4명이 사는 집에 1명만 아직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새로 계약한 그 집에서 코카콜라 티셔츠를 입고 있는 티나를 보았다.

                 

“어?! 안녕! 너 여기 살아?”


“응. 네가 이번에 여기 새로 이사 왔어?”


“어, 맞아. 근데 같은 수업에서 너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혹시 너 지난여름에 Sue 교수님 수업 듣지 않았어?”


“아~ 너도 그 수업에 있었어?”


“응. 나 그 수업에서 너를 많이 봤어. 그런데 하우스 메이트로 만나다니, 신기하다!”


“ㅋㅋㅋ 그러게.”


“나 지금 배고파서 음식 해 먹으려던 참인데 너도 같이 먹을래?


혹시 한국음식 먹어 본 적 있어?”


“아니. 한국음식 먹어본 적 없지만 먹는 거는 다 좋아!”


“푸하하~”

                

이렇게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 한국 음식, 일본 음식, 그리고 미국 음식으로 대동 단결을 했다. 할 일 없는 금요일 저녁이면 무엇을 먹고 싶은지 눈빛으로 대화하고 때로는 일본 음식점으로 때로는 한국 음식점으로 맛집 투어를 다녔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같은 미국 명절에 가족을 보러 한국으로 갈 수 없는 나와 함께 있기 위해 티나는 자신의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집에가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시작되던 24일부터 둘이 함께 장을 보고 각각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을 만들었다. 잡채,불고기, 주먹밥, 일본식 고로케 및 각종 튀김과 야채, 치즈 볼,훈제 햄 등등 2박 3일 동안 먹을 음식을 한꺼번에 만든 뒤, 거한 저녁을 함께 먹고 자신의 방에 있는 각각의 매트리스를 거실로 꺼내 크리스마스 파자마 파티를 했다.

         

도란도란 서로의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거실에서 티나의 PC를 연결해 제법 크게 볼 수 있었던 TV 화면으로 일본 드라마와 한국 드라마를 보며 2박 3일을 지냈다. 다행히 2명의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은 자신의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집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 둘은 너무 신나게 우리만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다. 유학 생활 중 최고로 재미있었던 크리스마스였다.


티나랑 함께 있는 동안은 오랜 유학 생활로 인한 외로움과 쓸쓸함 따위는 없었다. 우리는 죽이 잘 맞는 환상의 팀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것이든 부탁을 하는 것이 불편한 나는 티나에게만은 예외였다.

             

늘 나를 돕고 싶어 했던 티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교수님께 보낼 심포지움 원고 초안작성을 도와주었다. 나와 티나는 한국에 대해 더 많이 탐구하고 공부하고 발표할 자료를 다듬었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을 더 알리고 더욱 사랑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미술 역사 심포지움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한국을 더 잘 알릴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준비해 갔다. 티나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자료를 결코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아직은 신비로운 나라 한국에 대해 궁금해했고 심포지움이 끝나고나서도 내게서 한국의 도자기 생산지와 이 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그 지역의 가까운 한국 음식점을 알아내느라고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요즘의 나는 티나에게 종종 우리나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너 알지? 내가 한국을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지....


그런데 난 요즘 한국이 싫어. 친구들에게 우리나라를 소개하기 너무 창피해. 한국 사람들이 너무 부끄러워. 우리나라에 세월호사건 일어난 거 기억하지? 알고 보니 그 사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더라. 그냥 그 사고 자체가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이야.

            

부정과 부패가 아직 한국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공무원들에게 돈 조금 찔러 주면 안 되는 일에도 눈감아 주고, 사람들이 안전규칙 이런 걸 잘 지키지 않으니까, 세월호 같이 아마 똑같은 문제들이 다른 형태로 계속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유학하는 동안 나도 다른 한국인들처럼 한국이 그리웠고 인터넷신문 기사를 보면서 한국이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막상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보니 10년 전과 똑같아. 아무것도 좋게 바뀌지 않았어.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유학을 다녀왔는데도 급여도 그대로고, 부동산 가격이랑 물가는 점점오르고 있어서 앞으로 내가 갈 곳이 없어.

              

생각보다 한국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진 것 같아. 기대가 많이컸나 봐. 한국에 오니까 내가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조금 슬퍼. 이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100%한국인이 될 수 없어. 그렇다고 미국 사람도 아닌데 그렇다면 내 정체성은 도대체 뭘까? 

             

너 알지? 내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만큼 배신감이 더많이 자라난 것 같아.

              

나는 유학 생활 동안 미국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문화 충격을 현재 한국에서 겪고 있다. 내 상황을 이해해 줄 수 없고 내 생각에 공감할 수 없는 한국 친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민들을 티나를 비롯하여 나의 외국 친구들에게는 말 할 수 있다.


‘역문화 충격’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한국 사람이 아쉽게도 많이 없지만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과 배려의 마음 씀씀이가 가슴 깊이 박혀 있는 좋은 친구들이 다른 나라에 많이 있다는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미국에서 온 빵 선생

              

빵 선생은 내 친구 ‘브래드’의 별명이다.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2년 전에 한국에 왔고 내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한국 공립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브래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먹는’ 빵(Bread)과 영문 철자는 다르지만 학생들에게서 ‘빵 선생’ 혹은 ‘미국 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브래드는 항상 유쾌하고 즐겁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빵 선생은 고아원, 노인단체 혹은 외국인단체 등을 가리지 않고 함께 봉사활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친구를 둔 덕분에 나도 가끔은 이 친구가 참여하는 봉사 활동에 따라나섰다. 빵 선생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손꼽힐 정도로 마음씨가 곱고 착한 친구이다.

             

어느 날은 연중 두 번 열리는 서울 남산 걷기 대회에 혼자 참석하기 싫어 갑자기 당일에 같이 가자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운동화도 없이 밑창이 다 떨어진 불편한 구두로 구불구불한 서울남산 둘레 길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함께 걸어준 친구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여름 저녁 잔잔히 깔린 아름다운 노을 덕분에 숨이 차게 올라갔던 남산 정상에서 아름다운 서울의 모습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함께 걷자고 권유했을 때 빵 선생은나에게 구두가 망가졌다는 것을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빵선생의 신발이 망가진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남산 정상에 오르고 난 후였다. 운동화도 아닌 망가진 구두로 오랫동안 걷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힘들다고 한 번도 투정을 부리지도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빵 선생은 2년째 한국 생활 중인데 한국에서 얻는 소소한 문화 충격을 느낄 때마다 나와 이야기했다. 한국에서는 어째서 점심시간에 동료 선생님들과 무조건 함께 밥을 먹어야만 하는지, 그래서 그 동료들은 왜 점심시간에 자신이 혼자 가질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과 다른사람들과 친해질 기회를 가져가냐며 속상해한 적이 있었다.


또 한국 사람들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특유의 유교사상을 자신에게 강요하고 가르치며, 한국 사람들이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기를 강요할 때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국적만 다를 뿐, 나도 내 친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으로서 외국인인 내 친구에게, 내 친구도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인인 나에게, 서로에게 조언을 해 주며 서로에게 힘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빵 선생은 어디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우리의 토론 내용은 한국에 살고 있는 나를 포함하여 내 지인들도 힘들어하는 부분인 부동산 문제에 대해 이야기 했다. 부동산 시장이 오름세를 탄 요즘 시대에 한국 청년들이 도무지 재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제대로 된 독립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로 인해 많은 청년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연애, 결혼, 출산을포기하는 일 -요즘에는 인간관계, 내 집 마련이 추가되어 5포세대라고 함- 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이야기를 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공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으니 한국에 와서 더 외로워졌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 했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응, 알고 있었어.”

“지리학 용어 중에 ‘Push-pull factor’* 라는 용어가 있어. 혹시 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


“아니, 처음 들어. 그게 뭐야?”


Push-pull factor는 바로 밀어내는 요소와 당기는 요소인데 push factor는 어떤 국가에서 자국민이 그 나라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것이고, pull factor는 그 국가에 다른나라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반기는 요소라고 설명해 주었다.

               

*Push-pull factor

The push factor involves a force which acts to drive people awayfrom a place and the pull factor is what draws them to a new location.

               

나도 분명 한국 사람인데 어째서 한국 정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보통의 한국 사람들과 같이 생각할 수 없는지 그동안 너무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연이어 다른 질문들을 했다.


“빵 선생, 너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이 좋은 이유가뭐야?”


“음,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기회!”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사는 게 불편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좋으냐고 물었을 때 빵 선생은 나에게 


“한국은 정말 좋은 나라야. 나에게 많은 기회들을 주거든.”이라고 말했다.


“흠, 기회라...자국민인 나도 받은 적이 없는 기회가 너에게?”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만도 했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대우를 매우 잘 해 주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약소국 출신의 외국인들은 한국 사회에서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선진국의 사람들이 한국에 영어를 가르치러 오게 되면 자신의 나라와 많이 다른 주거 시스템 때문에 학원이나 학교에서 주거문제를 대신 정산해 주기도 한다. 만약 외국인 학생이 공부를 하러 오는 경우는 학생 수가 유지가 되지 않으면 한국 정부가 학교를 폐쇄하는 일도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대학들은 학교 운영의 어려움 및 학생 수 유지로 인해 외국인 학생이라도 받아야 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외국인에게 장학금이라도 주면서 학교를 유지해 나가기도한다. 특히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전세 개념의 문화는 외국인에겐 매우 생소하기 때문에 학원이나 학교에서 주거지원을 해 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박물관의 경우에도 다른 나라는 외국인에게 2배의 입장료를 받는 반면 우리나라는 외국인 할인이 적용되는 경우도 많다. 보건소에서도 외국인 등록증만 있으면 한국 국민들과 동등하게 건강 검진이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에 반해 내가 외국에서 수업료를 지급할 때를 생각해보면, 2년 이상 같은 주에서 살아온 미국인의 경우와 외국인의 경우 수업료 차이는 현지인들 보다 2배나 되었다. 또,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받은 의료, 문화 혜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어느 정도 학점을 유지했었기 때문에 나오는 장학금은 있었지만 오히려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동등하게 받지 못한 기회들이 있었을 뿐,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받는 특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친구 빵 선생 같은 경우가 ‘pull factor’인 경우이고 나 같은 경우는 ‘push factor’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앞선 글에 소개 된『큰발 중국 아가씨』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이린도 ‘push factor’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중국 안에서 선교사인 워너 가족과 함께 유모로서 생활해야 하다 보니 중국사람들이 입는 의복 양식을 따르지 않고 양장을 입었던 아이린에게 중국 사람들은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퍼부었다. 같은 중국인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가족까지도 말이다.


비록 나는 한국 사회가 보내오는 ‘밀고 당기기’에 힘을 쓰지못해 밀려서 튕겨져 나가야 하겠지만,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이기 때문에 미워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 짝사랑이라고 해 두어야겠다. 한국이 보다 발전되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도록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간절하다.


몇 해 전 서울 광화문의 Y문고에 책을 보러 갈 일이 있어 우연히 들렀다가 이런 글귀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은 타향에서 태어난다.
산다는 것은 고향을 찾는 일이다

- 독일 평론가 베르네


글귀 하나로 그동안 복잡했던 마음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빵 선생이 알려 준 어휘들과 이 글귀로 불안했던 내 마음이 드디어 편안해졌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선택해야 한다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다만 자신이 가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된다.


더욱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싶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가 유학을 먼저 갔다. 그 친구와는 어릴 때부터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오랫동안 보지 않았어도 다시 만났을 때 꽤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 우리가 학교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 친구도 나도 서로가 많이 변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 몇 년 동안이라고 하더라도 그동안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다 보니 서로가 많이 변해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친구가 많이 변한 것이 슬펐지만 그만큼 나도 살아온 환경에 적응하며 변했을 것이라고 느낀다. 비록 생각은 변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친하다. 그 친구가 나에게 그만큼 중요하고 그 친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존중해 주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이다.


이와 같이 내가 나고 자란 나라 한국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친구와 같은 느낌이 있다. 어릴 때와 다르게 우리나라에 대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졌을지라도 나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우리나라를 존중해 주려고 한다. 행여 내가 다른 나라에가서 산다고 해도 내가 한국인인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 처럼 말이다.

               

나에게 힘을 주는 소중한 내 친구들
그리고 아직은 사랑이 더 필요한 나의 나라 한국



*이 글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 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가공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수정일 2020년 5월
 

*아쉽게도 최근 종이책  전자책 출판 계약이 종료되었습니다조만간 다시 편집하여 도서 전문을 업로드해서 많은 분들이 자유롭게 다운로드 받아 읽으실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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