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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의 딸 May 05. 2020

피오리몬드 공주의 진주목걸이

01. 원치 않은 것을 강요받았던 기억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수많은 것을 강요받는다.

동네에 드문드문 보이는 서점 앞 유리창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필독서 입고 완료!’가 대서특필 되어있고, 인터넷 서점의 검색란에‘10대, 20대’와 같은 숫자만 검색해도 ‘과연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은 양이 검색되어 나온다. 대게 ‘초등학교 저학년을 위한 이솝우화’, ‘중, 고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 단편, 세계 단편’, ‘20대 대학생 필독서’,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와 같이 노골적인 것들이다.

 

 기름 난로 소리로 가득 찬 교실 안. 청록색 칠판에 궁서체로 짙게 쓰인 ‘자 습’. 초등학생티를 못

벗은 여자아이들이 어색하게 뽐낸 사복 차림으로 앉아있다. 그때 복도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 자는 친구들을 급하게 깨우고, 책꽂이의 책을 전달해주는 등 바쁜 모습이 연출된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소리는 복도 벽과 벽을 타고 교실로 이어져, 아이들에게 묘한 긴장감을 전하고 있다.

적막한 교실 안. 미닫이문이 열린다. 나는 긴장감에 그만 책장을 넘기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청록색 칠판 중앙에 쓰인 ‘자 습’ 앞으로 담임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밝은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그녀. 나는 이마로 눈을 치켜떠 처음 본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나는 계속해서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책장 모서리를 쓸었다. 베였던 손가락의 빨간 피가 도장 찍히듯 찍히고 있었다.   


교실을 가득 채우는 구두 소리. 나란히 열 맞춰져 있는 나무 책상 사이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간헐적인 관심을 주며 걷고 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책장 모서리를 쓸고 있는 내 책상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내 책을 집어 올린다. 빨간 입술을 벌려 제목을 읽는다. “피오리몬드 공주의 진주목걸이”. 그렇게 우리 반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의 첫 음성을 듣게 되었다. 한껏 얼어붙은 나에게 다시 그 입술을 벌려 큰 목소리를 말했다. “중학생 언니가 ‘공주 책’을 보면 어쩌죠?”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중학생이 언니면 고등학생은 엄마고, 20대 후반의 나는 증조할머니쯤 되려나… 아무렴 그녀는 내게 다시 책을 돌려주었다. 팔랑대는 표지 안쪽에는 유성 매직으로 꾹 눌러쓴 편지가 보일락 말락였다. ‘자랑스러운 나의 딸, 중학교 입학을 축하하며’. 그녀를 바라보던 친구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다 우물쭈물 대며, 다시 시선을 제자리로 옮긴다. 그렇게 나는 책을 다시 펴지 못한 채 표지만 응시했다. 고딕체로 반듯하게 적힌 제목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사건 이후 더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실에서 교과서를 제외한 어떠한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학생이 되고 말았다. 지금에서야 힘겹게 고백하건대 사실 이 증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고치는 데 꽤 외롭고, 긴 시간이 걸렸다.  

 

 나는 어렸을 적 기념일뿐만 아니라 일상의 연장에서도 책을 자주 선물 받던 애독자였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는 건 한순간이더라. 이런 일도 있었다. 집에서 여유롭게 독서를 하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저 독서를 한다는 자체가 거슬렸던 나는, 제목을 힐끗 보았는데 ‘피오리몬드 공주의 진주 목걸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내 마음속에는 용암이 들끓는 듯 엄청난 뜨거움이 솟아남을 느꼈고, 나는 여동생 몰래 그 책을 찢어 베란다로 던져 버렸다. 또 나의 이런 증세를 알 리 없는 부모님의 책 선물은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나의 이유 없는 짜증도 계속되었다. 왜 하필 그 책의 제목이 ‘공주’ 여야만 했는지, 원망의 화살은 부모님에게로 돌아갔다. 아직도 생생하다. 읽고 싶은 마음과 읽지 못하는 행동이 충돌하는, 이 아이러니란 일상생활에 여러 불편함을 주었다.  


 지금은 책 제목도 뚜렷이 기억나지 않아 온갖 ‘진주 목걸이’와 ‘공주’라는 단어로 미친 듯이 인터넷 검색을 해 겨우 책을 찾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책을 꽂을 공간이 부족한 책장과 함께 살고 있다. 부모님과 책 선물을 주고 받고, 이야기를 나누며, 이렇게 읽는 것을 넘어 글을 취미로 쓰기도 한다.  

 

 나의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공주처럼 빨간 립스틱을 고집하고 계실까. 그렇다면 오랜만에 찾아봬 ‘페리페라 틴트 앙큼보스’를 선물로 드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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