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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의 딸 May 19. 2020

야간 자율학습

01. 원치 않은 것을 강요받았던 기억

우리 집 식탁에는 의자가 다섯 개다. 하지만 이 의자들이 같은 시간에 다 채워진 적은 많지 않다. 특히 내가 야간 자율학습을 시작하면서, 오직 한 자리만 채워졌으니까.


고등학교 3학년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 배가 고플 때마다 종종 엄마는 따듯한 밥상을 차려 줬다. 빈 의자 사이에서 혼자 자리를 차지해, 밥을 먹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지만, 밥은 정말 따듯했다. 그 따듯한 밥을 숟가락에 가득 떠서 입안에 넣고, 우걱우걱 씹으면 침과 섞여 단맛과 고소함이 가득 퍼지는 그 순간을 오롯이 음미해야 하지만, 나는 그 밥을 씹는 게 힘들어 그냥 삼키곤 했다. 왜 그렇게 목구멍에 걸렸던 걸까.


나는 난독증과 공황장애가 있었다. 당시에는 그게 난독증인지, 그게 공황장애인지 몰랐다. 아마 내적 갈등과 혼란, 답답한 루틴에서 온 결과이지 않았을까. 그중 가장 큰 산은 '야간 자율학습'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전통과 선후배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사립 고등학교였다. 항상 흰 양말을 신었어야 했고, 신발주머니가 없으면 안 되는, 체벌이 자유로운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야자를 빼는 건 하늘의 별 따기 같았다. 야자를 빼려면 학원 선생님의 동의와 부모님의 동의, 각각의 사인 서류 또는 체벌이 필요해, 빼는 과정이 꽤 번거로웠기 때문에 그 당시 말을 잃은 나는 그저 묵묵히 버티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자 생황 속에서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났다. 우선 식탐이 늘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입안에 음식을 정말 말 그대로 욱여넣는, 마치 머슴처럼 숟가락이 휘청거릴 정도로 밥을 가득 떠서 입안에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그럼 잠깐 마음이 진정됐다. 또 교실 창문을 부쉈다. 는 농담. 반복되는 루틴과 교실 공간에 갇혀 있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연필이나 샤프, 볼펜 따위를 망가뜨렸다.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볼펜을 꾹 눌러쓰면, 그 힘을 못 이긴 심지가 망가졌고, 연필이나 샤프는 두 동강으로 부러뜨리기 일쑤였다. 그 덕에 거의 매일 매점에 출석해 필기구 구매도 필수, 간 김에 간식 구매도 필수가 되었다. 그리고 초조하고, 불안한 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나는 그만... 손목을... 그럴 용기는 나에게 없다. 아아 무지 겁 많은 나. 대신 나는 몸을 긁었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긁고, 목덜미와 팔이 그 희생양이었다. 특히 중지의 힘이 많이 가해져, 따끔거리는 느낌과 빨갛게 부어오르는 피부를 보면 그나마 마음이 한결 후련해진달까. 가여운 내 피부. 또 복도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인사 하는 친구에게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인사를 하면 말을 해야 하고, 말은 말을 부르니, 즉, 대화를 해야 하니까. 시력이 안 좋아서 못 봤다는 핑계를 대기 바빴다.


내 자리는 복도 쪽 벽면에 붙어 있는 곳이었는데, 야자시간이면 연필로 벽면 가득 낙서를 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힘든 것. 어려운 문제. 못하겠는 것. 피하고 싶은 것. 졸업하면 할 것. 20살 되면 하고 싶은 것. 버킷리스트 따위들 그리고 ‘ㅂㅇㄱㄱ’.


생각보다 ‘병원 가기’는 일찍 성취됐다. 도저히 이 증상들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던 나는, 부모님을 설득해 엄마와 함께 동네의 한 정신과를 찾았다. 엄청난 설문지를 작성하고, 상담실로 들어가는 엄마와 나. 푸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선생님.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어떤 증상이 있냐고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는 나. 옆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손톱을 매만지며, 상담을 듣는 엄마. 나의 폭포수 같은 말을 묵묵히 듣다, 말을 끊는 선생님. 필기체로 알 수 없는 글자를 종이에 마구 적더니, 난독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내렸다. 약 처방을 내리고, 가볍게 목례를 하는 선생님.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 나. 엄마는 어김없이 나에게 따듯한 밥상을 차려 주었다. 숟가락 가득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떠 입안에 욱여넣는 나. 그날은 어쩐지 아무리 씹어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욱여넣는 밥.


아아. 내가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그저 이 밥처럼 따듯한 말 한마디면 되는 거였는데...

다 괜찮다. 다 괜찮을 거다. 야자를 빼도 나의 성적과 미래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다. 그 시간을 활용해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글을 써도 괜찮다.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도 괜찮다...


그간 나의 고충들이 짧은 시간의 상담과 고작 몇 개의 알약으로 정리되다니. 괜히 갔다. 정신과.

나는 처방받은 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 어김없이 돌아온 야자시간. 내 자리 옆 벽면에 적혀있던 ‘ㅂㅇㄱㄱ’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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