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에 휴지 버리지 마세요. 쓰레기통에 버려주세요"
병원 화장실 벽에 붙은 A4용지에 인쇄된 문구를 볼 때마다 의문이 떠오른다. 그 문구 아래에는 정반대의 팻말이 있다. "화장지는 변기에 버려주세요." 생리대나 물티슈를 넣는 위생수거함이 설치되면서 원통형의 휴지통은 한동안 화장실에서 사라졌었다. 그러나 어느새 슬그머니 다시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 화장실의 휴지통을 없애려는 노력은 한두 번 시도된 것이 아니다. 가장 최근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맞아 공중화장실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면적 2000㎡ 이상 건물 화장실엔 변기 칸 안에 휴지통을 두지 않도록 하는 강력한 조치가 도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부분 공중화장실에서는 휴지통이 사라졌으나, 올림픽 이후 6년이 지난 지금은 상당수 화장실에서 도돌이표다. 위생과 청결을 가장 신경써야 하는 병원에서도 이러하니 다른 곳들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왜 그럴까? 자꾸만 막히는 변기, 그리고 화장실 바닥에 나뒹구는 지저분한 휴지들 때문에 결국 휴지통이 다시 등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누군가는 변기에 화장지가 아닌 이물질을 넣는 시민의식을 탓하고 휴지를 너무 많이 쓰는게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행동이 그리 빨리 바뀌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면 대처를 했어야 했는데, 과연 그렇게 했을까? 이 문제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화장실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휴지통을 없애면서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비해 청소노동자 인력을 충원한 곳이 있을까? 막힌 변기를 뚫는 것은 내 집에서 해도 고통스럽고 비위 상하는 노동이다. 그런 일의 노동 강도가 증가하였을 때 일하는 사람의 좌절과 분노는 헤아리기 어렵다. 아마도 휴지통은 그분들의 호소 또는 저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닐까 싶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시행령에까지 문구를 박아 휴지통을 없애려고 했던 사람들은 과연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예상하고 대책을 세웠을까? 나는 이에 대해 취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닐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면 우리 정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이에 기반해 예상되는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에 대체로 매우 서투르거나 무지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의정갈등도 그러한 서투름과 무지, 게다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집의 산물 아닐까. 생명이 걸린 의료제도의 손질도 이런 식으로 하는데 화장실 휴지통을 없애서 발생하는 문제에까지 신경을 쓸 리는 없다.
의료 현장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입을 모아 2,000명은 무리라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고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정책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해부실습을 할 카데바가 없고 입원환자 수보다 많은 의대생을 받아야 하는 의과대학도 생겨나는데 증원을 결정한 회의록은 없고 오로지 있는 것은 최고의사결정자의 집착과 고집 뿐이다. 의료공백에 공중보건의와 군의권을 동원하는 데 이어 이젠 외국의사까지 수입한다니 한숨만 나온다. 잘 조화된 팀 진료가 생명인 종합병원의 인력부족은 그런 식의 임시 방편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소위 ‘낙수과’로 낙인찍히고 국가 비상사태에 동원되어야 하는 필수의료과의 전문의 입장에서는 당장 이 사태가 끝나도 과연 전공의들이 얼마나 돌아올 것인지, 앞으로 과연 이 분야의 후학을 키울 수 있을 것인지 몰라 암담할 뿐이다.
휴지통이 없는 화장실은 깔끔할 것이고, 의사 수가 모든 진료과에 골고루 충분한 세상은 아름답고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간단히 휴지통만 없앤다고, 의대 정원만 늘린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