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오고 있는데... 그때까지만 살아있게 해주세요."
"임종시각을 저희가 정할 수는 없어요. 최대한 빨리 오시고, 그 전에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거의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수액을 계속 투여하고, 승압제를 계속 올린다. 콩팥 기능이 멈추어 이미 소변이 나오지 않는 환자는 점점 부어오른다. 목에서는 빠글거리는, 물에 잠긴 소리가 난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연명의료결정서에 서명했던 환자인데, 가족들이 임종의 순간을 지키기 위해 환자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과정을 점점 길게 겪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 죽음의 과정을 취재한 한 방송작가의 책 <그렇게 죽지 않는다>에는 안수기도를 받기 위해 목사님이 도착할 때까지 연명치료를 지속한 결과 몸이 부어 관 뚜껑이 닫히지 않은 환자의 예가 등장한다.
"입관식에서 만난 아버지는 아버지였지만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닌 모습이었다. 사망 후 하루 반이 지나는 동안 몸이 더 부어올라 있었다. 어떻게 하면 관 뚜껑이 닫힐 것인가 하는 문제가 고인의 얼굴을 보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자리인 입관식의 화두가 되었다."
(<그렇게 죽지 않는다>, 홍영아, 어떤책, 2022)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환자를 가족이 보아야 하니 시간을 끌어달라는 가족들이 많다. 이해할 수는 있다. 막상 병원에 도착했을 때 차갑게 굳어버린 시신을 보아야 하는 그 황망함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 그러나 그들이 보고자 하는 환자는 이미 그들과 말하고 감정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사람이 아니다. 의료진 입장에서는 고통의 시간을 더 연장하기를 요구하는 가족들이 밉고, 이기적이라 여겨진다. 물론 가족들이 자기 생각만 하느라 그런 요구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임종을 지켜야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라 여기는 것이 사회적인 통념이기 때문이다.
그 통념을 좀 바꿨으면 좋겠다. 임종을 지키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살아있는 환자와 평소에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가졌다면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실 그러지 못한 탓에 죄책감에 임종을 보고자 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임종을 지킨다고 환자에게 할 도리를 다했다 스스로를 달랠 수 있을까. 의료인 입장에선 그저 육신만 남아있는 환자의 생명징후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환자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은사님이신 모 교수님의 페이스북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부친이 외국에서 오고 있는 아들을 만날 수 있도록 승압제 치료를 지속해주지 않은 의료진에게 불만을 표시한 기자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래서 그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에서 응급 환자가 병실이 없어 몇 시간을 여러 병원을 떠돌다 사망하는 소위 '응급실 뺑뺑이' 사고가 왜 발생하는지 물었다. 응급 처치가 필요한 경우, 응급 수술 등이 시행된 후 중환자실로 가야 되는 경우가 많은데 중환자실에 빈 병상이 없으면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중요한 원인임을 설명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가 중환자실 병상을 장기간 차지하고 있으면, 그 기간 동안 다수의 급성 응급 환자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부연 설명했다."
- 허대석 선생님 페이스북 글 중에서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여러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우선이지만, 사실 중환자실치료를 정말로 꼭 필요로 하는 회복가능한 환자에게 돌아가야 할 자원이 낭비되지 않게 하기 위함도 있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목숨에는 경중이 없지만, 우리가 잃을 수밖에 없는 환자와 잃지 말아야 할 환자를 구분하여 제한된 자원을 배분해야 하는, 비정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의사들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강력한 요청, 그들의 진상(!) 성향의 정도에 따라 그런 결정이 생각보다 많이 좌우된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정의롭지 않다.
가족들이 임종을 지키게 해주기 위해 사용되는 연명의료는 정의롭지 않다. 냉정히 말해 낭비이며, 환자 본인에게도 더 해롭고 고통스러운 처사이다. 그것이 가져올 가치는 기껏해야 가족이 받게될 위안인데, 아빠의 임종을 지켰던 나의 경우 아빠의 마지막 호흡을 본다는 것은 위안보다는 트라우마에 가까웠다. 물론 그것을 보지 못하고 시신이 된 아빠를 바로 마주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그건 그것대로 괴롭고 죄책감이 많이 들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아빠의 마지막을 보았다고 해서 내가 아빠에게 좀더 살갑게 굴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덜해지지는 않았다. 결국 망자에 대한 회한과 슬픔은 임종을 지킴과 관계 없이 남은 자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고통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