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사태가 6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젠 정말 뉴 노멀이랄까요. 다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행히 6월부터 펠로우선생님들은 들어오셔서 같이 일하고 있기에 당직은 한달에 4회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교수님들도 병동진료에 익숙해지셔서 상황을 예측하고 오더 정리를 잘 해놓으시고, 간호사들과 협의해서 잡스러운 콜들 (PRN 오더대로 하면 되는데 굳이 노티하는 것들 등등)을 많이 줄였습니다. 사실 간호사들이 노티를 하는 이유는 정말 환자가 위중한 것 이외에도 오더에 불확실성이 있거나 담당의사의 의도를 잘 파악하기 어려울 때 확인하기 위한 것들이 많아서, 그 점을 의사들이 줄여주어야 노티를 덜 받고 편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들을 해결하려고 그동안 여러 교수님들이 노력을 많이 했고 간호사들과 협의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젠 밤에 좀 잠도 잘 수 있고 당직을 서도 회복하는 데 시간도 그리 오래걸리지는 않고요.
이런 노력들을 전공의들이 있었을 때 했어야 했는데, 만시지탄입니다. 9월엔 이 사태가 회복되는 것과 관계 없이 병동진료를 좀더 효율적이고 소진없이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비하기 위한 세미나 같은 모임도 과내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출근을 안하려고 했는데 다녀왔습니다. 수혈을 어제 저녁에 하려다가 오늘 혈액검사 후 하려고 미뤄놓았는데, 수혈동의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중엔 전문간호사가 각종 동의서를 받아주는데 주말에는 그들이 근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했습니다. 하필 오늘 당직은 두 분 다 회갑을 넘긴 교수님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원래는 인턴이 하는 업무인 수혈동의서를 받도록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원래 어제 했어야 했을 수혈을 오늘 하기 위해 당직에게 이런 부담을 안기는 것은 제가 평소에 제일 극혐했던 행태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서둘러 운전을 해서 병원에 가서 환자분에게 수혈동의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동의서 업무나 각종 잡일 (드레싱, 비위관 삽입, 도뇨관 삽입 등)은 전담간호사의 몫으로 많이 넘어갔습니다. 정말 2-3월의 초창기에는 이런 일까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동의서의 사소한 오기사항으로 몇 번이나 다시 받아야 하는 일이 생기면서는 (동의서는 하나라도 오기가 있으면 수정이 불가하고 다시 받아야 합니다...) 병동에서 분노와 짜증이 차올라 거의 제정신이 아니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담간호사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자잘한 술기들은 많이 해결이 되고 있고, 자잘한 오더들도 많이 챙겨주고 계십니다.
어찌어찌 돌아가고 있는 병원은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입니다. 이 정도의 진료부담만 있다면, 전공의들도 환자를 더 세심하게 보고 더 많이 배울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병원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저희는 6개월째 신환을 거의 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암환자가 한 해 약 25만명정도 되니 6개월동안 거의 10만명 이상의 신규 암환자가 발생했을텐데 그들은 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암환자들이 모두 큰 병원으로만 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분들도 있을텐데 그런 분들이 오지 못하고 계시겠죠.
얼마 전 우리병원도 참여하고 있던 MSI-H 직장암에 대한 면역항암제 임상시험의 등록이 종료되었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MSI-H 직장암은 전체 직장암의 2% 정도를 차지하는 드문 종양입니다. 그래도 한해 100명 넘는 직장암 환자들을 진료하니 2-3명 정도는 등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1명밖에 등록하지 못했습니다. 의정갈등으로 충분한 수의 환자를 진료하지 못했던 탓입니다. 직장암은 수술 후 평생 설사, 변실금에 시달리거나 항문을 살리지도 못할 수도 있고 젊은 환자들의 경우 성기능감소나 불임 같은 문제가 따라오기도 합니다. 면역항암제는 MSI-H 종양에서 매우 효과가 좋기 때문에 이런 후유증을 줄여주고 수술없이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의정사태가 길어지면서 이 임상시험에 들어올 수 있는 환자들을 놓쳐버린 셈입니다.
이 임상시험 뿐만 아니라 여러 임상시험들이 등록속도가 더뎌지면서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약산업과 임상시험은 이미 중국에 많이 뒤쳐지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우리 나라 의료진들의 수준높은 임상시험 진행과 관리 능력이었지만, 그것도 의정사태를 기점으로 기울기 시작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임상시험 등록속도가 더딘 병원에는 이후에는 임상시험을 유치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환자들이 새로운 약을 접할 기회도 줄어들겠죠. 연구간호사부터 해고시킬 것이고, 임상시험을 위한 병원 상근인력들도 줄여야 하겠죠. 연구비 수주가 줄어드니 연구 역량도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고, 전체적인 제약산업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은 아니겠죠. 큰 병원에서 환자들을 많이 보면서 그중에 임상시험 대상자를 선택할 수 있는 반면 지역병원은 점점 고사되고 있었습니다. 왜곡된 한국의료의 성장에 힘입어 발전해온 임상시험산업에도 향후 변화가 필요하겠지요.
아무튼 요즘 병원 돌아가는 상황을 주저리주저리 읊어보았습니다. 전공의들이 결국 사직처리되었지만 가을턴 전공의 모집은 예상했듯 거의 지원자가 없는 상황이네요. 이제는 사람들도 의정사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아픈 사람이 아니면 별로 신경쓰게 될 일이 없으니까요. 병원들은 이렇듯 '그럭저럭' '어영부영' 돌아가고는 있는 상황이지만 서서히 마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구감소도, 기후위기도, 그리고 미래세대가 사라진 의료의 위기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진행되며 우리의 목을 조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괜찮아보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