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jaundice, 그리고 쫀디스
yellow
미국에 연수를 가 있는 동안 현지 중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던지며 씩씩거리고 화를 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같은 반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yellow"라고 놀렸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나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었다. yellow라는 말이 black과 비슷한 층위의 말은 아닌가, 인종차별이라고 얘기할 수 있나 망설여졌던 것이다. 놀린 아이가 흑인이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Black Lives Matter" 는 시대를 강타한 구호가 아니던가. 자신이 블랙이니 아시아인을 옐로우라 부르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하고 어린 마음에 그리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들의 감정이 다친 건 사실이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싶었다. 담임선생님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는 학급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데 대해 대단히 죄송하고 부끄럽다며 답장을 보내왔다. 그는 이 일은 인종차별적 괴롭힘이 맞다고 확인해주었고, 우리는 자초지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학교측의 대처에 대해 듣기 위해 교감선생님과 따로 상담을 하게 되었다. 아무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고, 나중에 한국에 들어올 때 쯤 되어서는 아이는 가해자였던 친구와도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아시아인과 옐로우라는 키워드로 몇 번 검색을 해보았던 것이 그때였다.나로부터 그 사건에 대해 들은 모든 이들-한국인, 미국백인, 중국계미국인, 필리핀인-은 놀라면서 용납할 수 없는 인종차별이라고 말했다. 한편 아시아계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옐로우'라는 단어에 대해 다소 복잡한 심경을 갖고있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노란색은 유독물질이나 병든 피부색을 떠올리는 부정적인 의미로 아시아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데 쓰여왔지만, 흑인들이 스스로를 블랙으로 칭하며 정체성을 강화해 왔듯이 아시아계 이민자들 역시 ‘옐로우’에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던 것이다.
1960년대 말 민권운동이 부흥하던 시절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yellow power> <yellow seeds> <yellow brotherhood> 등의 구호나 단체 이름을 만들어 스스로를 부르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주제곡으로 콜드플레이의 곡 <yellow>의 만다린어 버전을 사용한 존 추 감독은 “yellow”에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려 했다고 한다. (인종문제와 문화다양성에 대해 주로 다루는 미 공영라디오 팟캐스트인 CODE SWTICH의 웹페이지의 한 기사 If We Call Ourselves Yellow 에서 읽은 내용이다. 그러나 yellow에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싶어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 역시 그들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들이 yellow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게 여긴다고 한다) 멸시적이고 차별적인 언어로 만든 옷을 스스럼없이 걸쳐 그것을 값지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늘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해볼 가치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jaundice
힙합 팬이자 래퍼꿈나무인 아들이 좋아하는 한 래퍼의 이름이 <영 잔디스>다. (아직 그리 유명하진 않은 것 같다.) 처음에 그 이름을 들었을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잔디스’가 Jaundice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쓴웃음이 났다. 캐나다 유학파 출신인 그가 동양인 래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jaundice는 황달을 의미하는 의학용어로, 간에서 생성된 쓸개즙이 십이지장으로 흐르지 않고 막히는 여러가지 질병에 의해 유발되는 병적 증상을 일컫는다. 간경변, 간암 등의 여러 간 질환 및 췌담도 질환에서 흔히 나타난다. 황달의 노란색은 밝고 명랑한 햇살이나 풍요로운 황금빛의 노란색이 아니다. 거무튀튀하고 음습한 절망의 색이다. 어쩌면 차별과 무시의 대상으로서의 아시아인의 피부색은 황달의 노란색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미 대륙횡단철도 공사에 동원되어 노역 중에 죽어간 중국인들, 20세기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던 한국인과 일본인의 땀과 땟국물에 절은 피부는 아마도 yellow보다는 jaundice가 차라리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yellow에 빛나는 이미지를 덧칠하려는 시도에 비해 jaundice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은폐된 차별의 현실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풍자적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힙합을 그리 즐기지 않는 40대의 꼰대다. 처음부터 그렇게 해석해줄 생각은 없었다. 굳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의학용어를 갖다 붙인 의도가 괘씸하고 짜증났다. 황달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비웃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랩을 한답시고 겉멋만 들어 뭐 좀 주워듣고 과시하려고 갖다붙이는 어설픈 놈팽이라고 생각했고, 아직 실제 그럴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아시안 정체성을 강조할 거면 미국에서 랩을 하지 왜 모두가 아시안인 한국에서? 게다가 한국의 여느 다른 래퍼들과 마찬가지로 저속한 말과 혐오발언으로 점철된 그의 가사를 보며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곡 중 하나인 ‘yellower’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한 부분도 담겨있긴 하다. 아시안은 부지런하고, 나이보다 어려보이며, 한편 힙합 음악에는 발을 담글 것 같지 않은 소심한 인간들이라는 정형화된 선입견을 비웃는다. 한편 흑인도 백인도 아닌 아시아인인 자신이 힙합 신에 나타난다는 것에 대한 인지부조화를 스스로 고백하는 듯한 (가사를 도저히 그대로 다 이해할 수 없어 짐작만 할 뿐이긴 하지만) 내용에도 역시 약간, 정말 약간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애써 들을 청중은 같은 아시안들밖에 없다는 것을, 최근 미국 웨스트우드 라디오의 Zach Sang show에 출연한 에릭 남의 발언을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아시아계에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해 비판하며 그나마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은 한국이었고 외모로 자신을 차별하지 않는 곳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백인과 동양인 이외의 외모는 차별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요, 영 잔디스 씨, 이왕 한국 힙합 씬에 도전했으니 여기서 성공을 거둔다면, 그리고 만약 해외에도 진출할 수 있다면 미국 힙합 씬 역시 싯누런 담즙색으로 물들여버리길 바랍니다. 당신 팬의 어머니로부터.
쫀디스
그런데 jaundice의 한국식 발음은 잔디스가 아니다. 여기서 ‘한국식’이라 함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국문표기나 발음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 한국 언중의 발음 방식을 일컫는다. jaundice라는 의학용어를 사용하는 한국의 언중인 의료인들은 ‘쫀디스’라고 발음한다. 어떤 이들은 모든 음절을 된소리로 바꿔서 ‘쫀띠쓰’라고 하기도 한다. 외래어가 원래 발음과는 달리 된소리로 발음되는 현상은 한국어에서 흔한데, ‘뻐스’ ‘껌’ ‘빽’ ‘빵꾸’ 등이 그렇다. 외래어를 한국의 언중이 발음하는 형태로 표기할 것인지 원래의 발음대로 표기할 것인지가 국어학계에서는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었던 모양이지만, 왜 외국어가 한국에 오면 흔히 된소리가 되는지에 대한 고찰은 찾기가 어렵다. 다만 외래어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어에서 된소리발음이 상대적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고, 산업화와 근대화에 따른 사회적 각박함의 반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된소리의 형성과정에 대해 국어학자가 아닌 나는 학술적으로 분석할 힘은 없지만, 왜 ‘잔디스’가 ‘쫀디스’가 되었는지는 알 것 같기도 하다. ‘쫀디스’는 대개 병이 많이 악화되었음을 의미하고, 염증이 동반되었을 때에는 응급 담즙배액술을 해야 하기도 하며, 간경변 환자라면 간이식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황급히 환자 상태를 보고하며 한숨짓는 의료인의 마음은 된소리가 되어 입술에서 터져나온다. 싯누런 눈자위와 환자의 옆구리에서 배액되는 거무튀튀한 액체, 배액관을 감싼 거즈에 배어나오는 녹색에 가까운 담즙은 세계에서도 유독 우리 의료진에게 더 익숙한 풍경이기도 하다. B형 간염바이러스 감염 또는 알콜 중독으로 인한 간경변, 기생충 감염으로 인한 담관염과 담관암은 (이제 그 빈도가 점차 감소하고 있기는 하지만)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에 상대적으로 흔한 질병이다. 그리하여 이들 질환이 유발하는 증상인 ‘쫀디스’, 또는 ‘쫀띠스’는 간담도질환에 고통받는 한국인의 맥락을 반영한 언어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쫀디스’는 어디까지나 의료인의 시선이다. 환자보다는 의료인의 피로가 그 된소리에 담겨있고, 환자 자신보다 의료인이 인식하는 (그리고 차마 환자에게 말하지 못하는 나쁜 예후의) 타자의 질병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그러나 환자가 인식하는 언어, ‘쫀디스’ 아닌 ‘황달’에 담겨있는 것은 때로 더 큰,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다. 예를 들어 2004년 작고한 사회학자 김진균 선생님이 말하는 황달의 노란색은 굳이 된소리에 담길 필요가 없었다. ‘싯누런’ ‘거무튀튀한’ 따위의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다. 그냥 담담히 '노랗다'고만 해도 우리는 그 노란색에 담겨있는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신께 암이 재발하고 황달이 찾아왔을 때도 선생님은 황달 든 세상과 노동자를 더 걱정했다. “오늘 노동자의 살길이 노랗고, 죽은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노랗고, 불쌍한 다른 노동자들이 노랗다” (한겨레 2004, <김진균 선생님을 그리며>, 고병권)
아니,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시안의 yellow에 대한 생각을 백인이나 흑인이 다 알 수 없듯이, 환자가 느끼는 노란색을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없다. 게다가 그것이 확장된 '황달 든 세상'을 병원 안이라는 우물 안에서 다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단지 더 귀기울이는 것,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부터 연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