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희들 병원 들어가면 고어(古語)같은 것도 따로 배워야된다?”
“네?”
“고진선처 앙망하나이다 이런거….”
음? 해부학용어도 웬만큼 외웠고 질병 이름도 이 정도면 많이 외웠는데 이건 본과 4학년 선배가 말하는 용어는 무슨 서당훈장같은 얘기지?
“컨설트내면 말이지, 컨설트는 다른 과에 우리 환자 봐달라고 부탁하는 거거든. 내과 환자가 있는데 입원 중에 병원에서 넘어져서 골절이 생겼어. 정형외과에서 봐줘야 하잖아? 그러면 우리 과 환자 봐달라고 컨설트를 내지. 이러이러해서 봐달라고 쓰고 맨 아래에 <고진선처 앙망하나이다>라고 붙여. 그게 예의야.”
“안 붙이면 문제가 생겨요?”
“음… 뭐 그렇진 않지만 다른 과 환자까지 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거니까 최대한 정중하게 쓰는거지.”
“근데 왜 그런 말을 굳이 붙여요?”
“그렇게 쓰는게 예의라니까!”
그렇게 처음 들은 구절인 ‘고진선처 앙망하나이다'는 이후 20년간 수없이 써온 컨설트 페이퍼에 적어온 말이기도 하다. ‘앙망(仰望)'에다가 ‘하나이다'까지 붙이기는 좀 너무 문어체 같아서 ‘고진선처 바랍니다' 정도로 쓰는게 보통인데, 문득 궁금해서 찾아보니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다만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오픈사전인 우리말샘에는 고진선처 (苦盡善處)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다. “고생하더라도 선처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힘들고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적절하게 잘 처리해 주기를 부탁할 때 쓰는 말.” 다른 단어를 써보려고 했지만 은근히 적절하게 넣을 단어가 생각이 안났던 것은 관습때문일 수도 있고 언어 능력의 부족때문일 수도 있겠다. ‘잘 부탁드립니다'는 너무 사적인 느낌도 들고, 물건이나 행위가 아닌 사람을 부탁하는 말로는 왠지 가벼운 느낌이 든다. 한편 ‘~에 대해 의뢰드립니다'는 딱딱하고 차가운 듯 하여 쓰기 애매하다. 공적인 무게감이 어느 정도 있으면서도 의뢰하는 사람이 최대한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느낌이 드는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고진선처'밖에 떠오르지를 않는 것이다. 특히 컨설트의 내용이 복잡하고 어려울 수록 ‘의뢰드립니다'보다는 ‘고진선처'라는 말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받는 컨설트의 상당부분은 외과 병동에서 온다. 수술을 하였고 결과가 이러하니 항암치료를 해야 할 지 판단을 해달라는 내용이다. 보통 2,3기 이상 진행된 암으로 수술한 환자들이 의뢰가 오기 때문에 대부분은 원칙적으로는 항암치료를 해야 하는 환자들이다. 그러나 나이가 많거나 장기 기능이 떨어져 있으면 항암치료를 하는게 오히려 환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결정한다. 아무래도 환자가 항암치료를 할 만큼 체력이 괜찮은지가 제일 중요한데, 그건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정하기가 어렵다. 가끔 병동에 가 보아도 환자는 실밥을 언제 빼는지, 언제 식사를 할 수 있는지 등 외과의사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들을 나에게 물어보기 때문에 맥이 빠진다. 어차피 수술 후 한달 정도는 지났을 때 몸 상태를 다시 평가해야 하고, 그때나 되어야 항암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그래도 전문의로서 내 환자를 받기 시작한 초반에는 의욕이 넘쳐서 그 컨설트를 보러 이 병동 저 병동을 누볐는데, 어느 시기부터는 시간 대비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힘들게 병동까지 가서 만나고 설명을 해도 환자는 당장 수술에서 회복되는게 주 관심사라, 항암치료에 대한 설명이 귀에 안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외래에서 다시 만나면 ‘당신은 누구냐'는 표정을 짓는 이들이 태반이라 맥이 빠졌다.
결국 환자는 보지 않고 컨설트 회신만 남기기 시작했다. “항암치료가 추천됩니다만 수술 후 회복정도를 보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술 후 3-4주경 일반혈액검사, 일반화학검사 및 종양표지자 검사를 하고 외래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이 정도면 정말 명쾌하고 깔끔하지 않나. 언제 회신이 오느냐고 외과 선생님이 전공의에게 닥달할텐데 최대한 빨리 회신을 주는 것이 미덕이지.
컨설트 회신 작업은 점점 효율이 올랐다. 입원 중에 결정을 빨리 해줘야 하는 환자는 병동에 가서 보지만, 어차피 나중에 외래에서 봐야 하는 환자는 주요 병력사항만 정리해두고 외래로 보내달라며 간단 회신만 남긴다. 컨설트 목록을 펼치고는 이 두 가지 분류부터 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가 되었다.
어느 날은 평소에 잘 컨설트가 오지 않는 진료과에서 의뢰서가 날아왔다. 역시 수술 후 항암치료 의뢰, 전자 차트를 보니 아직 죽도 못먹고 있는 환자라 가서 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큰 수술을 해서 그런지 회복도 오래 걸릴 듯 하여, 깔끔한 회신만 바로 써서 날리기로 했다. 아직 나를 만날 때가 아니니 나중에 회복되면 보내주시오, 라고.
그랬는데 그 의뢰를 한, 한참 윗 연배의 선생님을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환자 있잖아…”
“아 네 회신 드렸습니다. 선생님. 퇴원 후 외래로 보내주시면 되셔요.”
“좀 병동에 와서 봐주면 안돼?”
“아….네…”
“환자가 수술한 다음에 무슨 치료 하는지 궁금해하고 그러잖아. 신경 좀 써줘. 알았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가 가서 만나봐야 어차피 지금 항암을 할 건 아니어서요'라고 당돌하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우선은 그가 손윗사람이었기 때문이었겠으나, 한편으로는 ‘그래도 가서 환자를 만나보는게 맞지 않나’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목소리가 아직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효율은 우리 나라의 의료가 추구하는 최고의 미덕이다. 최소의 자본과 노동으로 국민이 최대한 건강하게 만드는 것. 의료서비스의 가격이 저렴하게 책정되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의사 수에 비해 환자가 많은 수요공급의 불일치 때문이기도 했다. 3분진료를 해도, 의료비 지출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적어도 국민들의 기대수명은 세계 최고이고 암 생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나 역시 그 효율에 따라 움직여왔던 셈이다. 환자를 당장 만나서 항암치료를 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설명은 항암치료 시작할 때 또 해야 하는데, 지금 환자 한 명을 만나자고 병동에 가서 설명하고 돌아오는 데 드는 총 20-30분을 내가 다른 일을 하는 데 쓰는 것이 더 경제적이니까.
그럼에도 ‘그래도 병동에 와서 좀 봐주면 안되느냐'는 부탁에 새삼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래도 컨설트를 받았으면 아무리 사소한 문제여도 환자를 직접 보고 판단하는게 기본이라는 합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환자의 입장에서 고민해달라는 부탁이기도 하다. 당장 항암치료를 할 것은 아니어도 환자는 수술 후의 치료 여정에 대한 궁금증이 당연히 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을 해달라는 부탁. 협진의뢰는 내 환자를 와서 직접 보고 같이 고민해달라는, 즉 자문(consult)이 아닌 초대(invitation)에 가까운 것이니까. 당신의 전문분야의 지식과 경험에 근거하여 환자의 상황을 판단해달라는 부탁이기도 하지만, 불특정의 환자가 아닌 바로 이 환자의 구체적 상황에 개입해달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굳이 ‘고진선처'라는 비효율적인 말이 아직 남아있는 이유도, 그런 비효율적이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일을 다른 의사에게 요구하는 데 알맞은 다른 단어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 이후에도 모든 컨설트를 직접 가서 보는 것은 못하고 있다.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면담이 꼭 필요한 환자들에게 시간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외래진료로 돌린다. 내가 내는 컨설트도 모두 성의있는 회신이 오는 것은 아니다. 교과서와 최신 논문을 인용하며 전문성을 드러내지만 정작 환자는 제대로 보지 않은 게 분명한 기계적인 회신이 돌아오면 한숨이 나온다. 컨설트는 정말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난감하고 어려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의료진들에게 분산시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고진선처 바랍니다'라는 말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사람을 부탁하는 행위의 엄중함과 절실함을, 아직은 알고 있다는 미약한 증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