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에게 이런 면이?
우리가 연애를 시작하기로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 나는 친한 B 언니와 함께 휴가를 쓰고 평일 낮을 즐기기로 했다.
언니와는 전 회사에서 만나 지금 회사까지 함께 다니게 된 각별한 동료 사이였다. 지금 회사에 포지션이 생겼을 때 알려준 것도, 데이터에 관심이 있다면 T와 친해져 보라고 제일 처음 얘기해 준 사람도 언니였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B 언니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같은 회사 사람이니까..! 그 말로만 듣던 비밀 사내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두둥.
그리하여 근질근질한 입과 난처한 마음으로 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 갑자기 위가 아프고 속이 쓰린 것 아닌가. 용산역 근처 한 파스타 집에서 만나기로 한 우리였는데, 어째 식당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컨디션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고 눈앞이 핑. 식당 근처 담벼락 근처에서 어지러워하는 나를 발견한 언니는 마침 근처였던 언니네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약을 먹고 언니네 거실 소파에 누워 골골대던 나. 한숨 자고 일어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아차. 나 남자친구 있었지. 왠지 남자친구니까 내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어색하지만 그에게 톡을 보냈다.
‘오늘 B 언니를 만났는데 사실 몸이 안 좋아져서 언니네 집에 누워있어요. 지금은 좀 괜찮은데 조금만 더 누워있다가 집에 가려고요 ㅠㅠ’
30분쯤 지났을까?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소 알려줘요! 회의 끝나자마자 바로 제가 갈게요 ‘
‘엇 오늘 늦게까지 할 일 있는 거 아니에요? 그냥 택시 타고 집에 가면 돼요!’
‘아니에요 곧 회의 끝날 것 같아요 출발하면서 연락할게요’
예상외의(?) 답변에 살짝 놀랐다. T는 항상 야근하는 사람이고, 일 외의 일정으로 평일 이른 저녁 퇴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내 생일선물 사러 일찍 퇴근한 것도 그래서 놀랄 일이었다). 그리고 30대쯤이 되면 솔직히 자기중심적으로 먼저 계산하게 되지 않나. 일이 먼저이고, 내 선약이 먼저이고, 내 시간과 돈이 먼저인. 솔직히 뭐 그렇게 깊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디 실려간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바로 오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때 아는 철학과 친구가 내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사랑은 드라마 주인공이 핸들을 확 꺾어 차를 돌려 상대에게 향하는 유턴 같은 거라고. 나도 모르게 감정이 스멀스멀 쌓일 수는 있지만, 결국 어느 순간에는 마음을 먹고 과감하게 방향을 정해 행동을 하게 되는 거라고. 나는 T의 반응에서 과감한 유턴을 하는 드라마 주인공을 보았다. 수년간 쌓아왔던 자신의 우선순위를 내려놓는 모습. 조심스레 찬찬히 조정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나를 중심으로 두는 모습. 그의 평소 일을 대하는 태도와 신중함을 아는 사람으로서 얼떨떨해졌다. 우리는 친한 동료도, 소개팅으로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는 어색한 연인도 아니다.
그의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B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택시가 도착한 것 같다는 거짓말을 하며 1층으로 내려와 그를 만났다. 한껏 걱정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곤 조심조심 차를 운전해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고 보호해 주려는 사람이 생겼구나.
그렇게 나는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