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9번의 잠 - 24 로마 진실의입+판테온+익숙한곳의다른편+저녁의약속
꼭 23번의 잠, 로마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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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나 광장에서 엘과 진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나보나 광장에서 pm6시에 만나
오랜만에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정해 누군가와 만나는 약속을 했다
그런 약속을 상상하지 못한 곳, 로마에서
만나는 순간보다 그 순간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좋다
결국 우리의 만남이 헤어짐을 위한 것이었고 그마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약속 시간이 다가오기 전의 기다림과 설렘 만으로 충분했다
가지 않은 곳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까도 까도 파고 파도 자꾸 매력이 흘러넘치는 도시
로마의 휴일 영화 속 장면으로 유명하고 대놓고 관광 필수 코스지만
과거에 본 기억만 가지고 돌아갈 수는 없는 곳이기에
오늘 진실의 입을 보러 왔다
역시나 줄을 서야 했고 나는 진실을 묻는 대신 인증의 사진 한 장으로 만족한다
물어야 할 진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야 할 사안이다
진실의 입이 있는 곳에서 길을 돌아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인 멋진 곳이
나타나는데 이 공간이 낯설지가 않다
아마도 나무가 흔들릴 정도로 강풍이 불었다고 한 날 무작정 버스에서 내려
모래바람을 헤치고 버텼던 넓고 푸른 그곳 어디인 듯싶다
(팔라티노 언덕 Palatino)
로마의 길은 정말 의외의 곳에서 통하고 있어
가끔은 당황스러우면서도 새로운 발견을 한 것 같은 소소한 기쁨이 있다
어느 길로 들어서서 그냥 걷다 보니 아직도 가지 않았고 꼭 가야 했던
판테온 Pantheon 이 지금 내 앞에 떡 하니 나타난다
어차피 만나야 할 거라면 한 발 앞선 우연이면 더 반갑고 기쁘지 않나
당장 판테온으로 들어가 뻥 뚫린 천장의 치밀하고 과학적인 신비한 원형의 구멍을 통해
비가 오지 않는 맑은 하늘에서 비 대신 쏟아지는 빛을
경이로운 시선과 경건한 마음으로 올려다본다
베네치아 광장의 번화한 길을 건너 또 다른 뒤편으로
흐르는 강 위의 다리 하나를 건너 지나오면
관광객의 발길은 이어지지 않고 현지인들은 매일처럼 발자국을 남기는 어느 길에
채 복구되지도 가꿔지지도 않은 로마의 흔한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
고요하고 오래된 시간이 머무는 장소에 이른다
이곳 또한 엄연한 이름을 가진 곳이겠지만 유명세에 조금 밀리고
이곳을 찾은 나에게조차 제대로 이름 불리지 못한다 그 생각이 퍼뜩 떠오르니
미비한 지식으로 대범하게 로마를 싸돌아다니는 내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진다
깜피돌리오 광장 또 다른 뒤편으로 이르는 조용한 산책길은
포로 로마노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을 올라서 간다
그 사잇길은 이 번화한 관광지에서 감쪽같이 숨을 수 있는 정말 조용한 길이라
나는 이 길로 걸어 천사의 계단 교회를 가기도 했고
다시 그 길을 통해 돌아와 포로 로마노를 한 번 더 내려다보곤 했다
해가 지기 전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며 길을 지났다가
아직 위시 리스트로 남겨져 있던 포로 로마노에서 해가 지는 순간을 보기 위해
다시 같은 길로 돌아온다 그리고 염원했던 곳에서의 노을을 드디어 본다
아마도 어제에 이어 맑았던 하늘 + 어제보다 강해진 구름을 몰고 다니는 바람
오늘의 이런 날씨 덕분에 약간의 쌀쌀함을 충분히 감당하면서
노을 지는 하늘과 포로 로마노가 콜라보한 이 멋진 장면을 볼 수 있었으리라
그 어느 순간도 놓치기 싫어 해가 지는 짧은 시간 동안
포로 로마노의 서쪽과 깜피돌리오 광장의 서쪽을 정신없이 오가며
하늘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이렇게나 열심히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해가 거의 넘어가기 직전
바람을 타고 빠르게 흐른 구름의 지분이 상당했던 하늘로 번지는
한 줄기의 노을이 더욱 특별했던 오늘의 해 질 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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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남과 진짜 작별의 인사를 위해 주저 없이
와 준 것에 대해 네게 고마운 마음을 여기 남길게
어쨌든 여지를 주었기 때문에 포기가 되지 않았던 너는
playing game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를 내게 던졌고
아마도 밀당이라는 좋아하지 않는 연애의 방식으로 내가 너를
힘들게 하는 부분이 있었겠구나 싶어
나란히 선 에스컬레이터에서 다른 사람에게 방해된다며
뒤로 선 나의 손을 네 어깨 위에 올려두었을 때 거절을 장난으로 넘기려고
네 목을 살짝 꼬집었는데 그건 너무 위험하고 도발적인 행동이라고 말해서
내 머리엔 퀘스천 마크가 서너 개 그려졌었어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은 너에게 주의를 줄 때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라거나 한국에서는...? 이라는 단서를 붙여
서로의 다른 문화를 부연 설명해야 하는 일도 자주 있었지
마지막 날 만나기로 한 장소는 나보나 광장의 교회 앞이었고
대중교통 대신 차를 몰고 오는 너는 교통 체증으로 차가 막혀 지각 중이었고
나는 추위 때문에 교회 안으로 들어가 30여 분 정도를 강제 예배 중이었고 그런데
너는 늦게 도착해서 사과를 먼저 하지 않고 왜 교회의 앞이 아니라 안에 있냐고
흥분을 했어 그게 너의 성격인지 이탈리아인의 특성인지 난 모르겠고
선 순위와 후 순위가 바뀐 것에 대해 상한 나의 기분을 설명했을 때
사과는 자꾸만 뒤로 숨기고 로마의 교통 체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변명으로
네 입장만 끊임없이 대변했지 나는 너의 사유가 나의 행동을 어째서 이겨버리는지도
다정한 눈빛이나 손길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너의 태도도 이해되지 않았어
그래도 이미 말했지만 고마움이 없지는 않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연락 달라는 너의 당부에 따르지 않았어도 그만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너에게 마지막 연락을 했고 네 입장에서는
늘 대화나 만남의 우선권이 나에게 있는 것에 대해 기분이 상했을 법도 한데
내가 원한 장소와 시간에 맞추고 멀리서 달려와 너의 시간을 내게 할애해 준 것에
미안한 마음도 없을 수는 없고
그렇지만 나의 결론은 결국 처음과 다르지 않게 우린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런 너를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어
+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경험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나는 때때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어떤 이와의 연애를 꿈꾼 적도 있었는데
내게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만은 아니라서
말로든 글로든 나의 생각과 진심을 세심하게 표현하고 제대로 전달해야 직성이 풀려서
화려한 표현이 아니라 아름다운 의미를 품은 단어와 문장이 가진 힘을 사랑해서
남의 나라 언어든 나의 나라 언어든 겨우 소통이 되는 사람과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하긴 나는 성별 나이 불문한 누구와도 내 나라의 말이 통하지 않는
시간들에 대해선 늘 못 견뎌했다 쓸데없는 말과 의미 없는 대화들로 넘쳐나는
공적이고 사적인 순간에서 자주 튕겨져 나왔다
다수의 그들이 평범한 것이라고 하면 소수일 수도 있는 내가
이상할 수도 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모든 사람 각각이 이상하지도 않고 특별하기만 하며
나도 이런 식의 특별한 사람인 것이다
나는, 언어를 통해 대화를 통해
내가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잘 표현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전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그게 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