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에이치제이 Feb 11. 2022

그, 2월 11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16 파리


꼭 15번의 잠, 파리 5일




+++


골목은 어디선가 자주 만난다 유럽의 좁은 길들은 막다른 길보다

끝없이 어디론가 이어져 만나고 다시 갈라지다가 다른 길과 또 만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오늘 물랑루즈를 구경하고 낡고 분위기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서 걷다가

많은 사람이 아는 흔한 길이 아닌 좁은 길들을 이어 걷고 걷다가

몽마르트르 언덕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뒷길 어디로 올라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뒷모습을

남몰래 훔쳐보는 기분으로 마주했다가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대성당의 앞마당으로 가서

대성당의 정면을 향해 제대로 된 인사를 했다 


물론 물랑루즈는 몽마르뜨르 구역에 있고 어쩐지 길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했고 

내가 간 길이 결코 소수에게만 허락된 숨은 길은 아니었을 테지만

지도 없이 하나의 목적 앞에 도달했다가 계획 없이 발견한 길과 별안간의 특별한 마주침을

나 혼자서 우연이라 치부하며 좋아하는 게 뭐 어떤가 싶다





오늘의 목적지 퐁피두 센터 Centre Georges-Pompidou

예술가를 동경하는 나는 예술가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나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차원이 다른 삶을 우러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우러르는 내 모습이 본의 아니게 작아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마도

퐁피두 센터 앞에 서서 한껏 고개를 들고 묘한 감정이 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뭐라 정의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과 그 안에 무수히 타오르고 있는

예술적 열정 전부를 아우르는 무엇이 평범한 인간 따위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찌부러지거나 그 무게를 내 것처럼 영원히 느끼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동경의 부피와 예술의 무게는 살아가는데 오히려 힘이 되는,무엇이지

나를, 내 삶을, 갉아먹는 무엇이 아니니까





 퐁피두 센터는 레알 Les Halles 지역과 마레 Le Marais 지역 인근에 있기 때문에

걷다 보니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한 마레지구에 들어서게 되고

걷다 보니 시청사 Hôtel de Ville를 만나게 된다


조금 가벼운 마음이 되어 특별한 것들을 눈으로 소비하는 사람이 된다

창작의 시간과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이는

이렇게 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대가를 치르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니 어떻게 시기를 할 수 있나



+

쁘띠 PETTITE라는 수식어처럼 아기자기한 취향의 물건들이 가득한 가게에

이끌리듯 들어갔다가 사고 싶은 게 많았지만 파손의 염려가 없는 빈티지 틴케이스 하나만 사서 나왔다

나중에 보니 made in England 아무렴 어떤가 마음에 들면 그만



+

파리 시청사 Hôtel de Ville를 지나 다시 되돌아가는 방향의 길을 걸어

퐁피두 센터 뒤쪽으로 왔다 이제는 잠시 돌아가야 하는 타이밍이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목 한쪽에서 책방을 발견해 만화책을 사려다가

그림은 익숙하고 내용은 결코 모를 프랑스 요리책 한 권을 샀다

캐리어 한쪽에 책들이 조금 쌓이고 있다 쇼핑한 다른 것들까지 잘 채워 넣으려면

마지막 도시인 이곳에서 미련 없이 짐을 비워내야겠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첫날밤에 봤던 특이한 콘크리트 건물을 이제야 제대로 다시 보게 된다 

들고 나기 바빠 동네라고 눈여겨보지 않아 이런저런 것들을 놓치고 있었나 보다





오늘 밤 외출의 목적지 한 곳은 물랑루즈다

나중에 가려고 미뤄뒀다가 시간이 모자라면 왠지 가지 않을 것 같아서

일찌감치 이곳만 찍고 돌아오기로 하고 나서는 길이다


물랑루즈 Moulin Rouge 빨간 풍차

나는 그저 후회 없는 인증을 위해 왔지만 저 앞에 몰려있는 많은 사람들은 입장을

고려하고 이곳을 찾은 것일까 못 갈 곳처럼 바라보는 한참 전에 어른이 된 나의 이런 생각이

한심한가 모르겠고 나는 나라서 나는 물랑루즈를 끼고 들어선 골목을 걷는다


마레지구의 특별한 느낌과는 다른 특이하고 시선을 끄는 골목길의 풍경 때문에

밤길을 전전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길을 찾은 이에게만 허락된

숨겨진 비밀의 골목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밤 산책은

계속되는데 뭔가 예사롭지 않은 곳으로 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범상치 않은 거대한 뒤태를 맞닥뜨렸을 때였다





몽마르뜨르 Montmartre  사크레쾨르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필터를 쓰지도 않았는데 밤의 대성당은 온통 흑백이다 시간에 쫓겨 몽마르뜨르 입구에서

급히 뒤돌아서야 했던 오래 전의 실수를 생각하니 이런 극적인 만남이 

더 반갑고 감격스럽다


대성당의 크고 묵직한 문은 늦은 시간에도 활짝 열려 있어

망설임 없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오랫동안 소망했던 순간이었기에

이미 특별하고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바깥의 낮밤의 여부와 상관없이 

눈앞에서 빛난다 하얀빛의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것 같은 천사의 아우라 앞에서는

순수하고 깨끗하지 못한 까만 마음마저 용서받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건 어쩌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이 투영된 걸지도 모르겠다



+

대성당을 나와 안개와 구름 때문에 이 또한 필터를 장착한 듯한

파리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곧 크게 미련을 두지 않고 돌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좋지만 날이 좋은 날의 낮과 밤에 다시 몽마르뜨르 언덕에 오를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어서였다


길고 긴 계단 대신 푸니쿨라를 타고 언덕을 내려온다

나비고 패스가 있다면 free 탑승이 가능하고 밤이 깊었기 때문에


내렸던 역과 다른 역 앞에 왔지만 별 문제는 없다

파리는 환승이 기본이고 이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제법 익숙해져서

어디서 내려도 어디서 타도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가는 버스나 지하철은 

반드시 있으니 걱정 없다고 믿게 되었으니까






+


+

pm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고 열차 플랫폼 계단으로 막 내려가려고 할 때

집으로 데려다 줄 지하철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보폭이 좁고 낮은 (거긴 유독 그랬다)

계단을 두세 칸씩 성큼성큼 내려가다가 거의 마지막 몇 계단을 앞두고

스텝이 꼬여 맨바닥에 제대로 슬라이딩을 하며 넘어졌다

다친 게 걱정일 텐데 (대체로 그러하듯) 급히 주위를 살피고는 다행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서 얼른 지하철을 탔다 창피함은 내 몫이기만 해서

괜찮았는데 여기저기 좀 아프긴 했다 그런데 웃음이 더 많이 났다 참나 뭘 그렇게 서두르려다가

집으로 와서 확인하니 손바닥과 무릎에 피멍이 들고 까진 곳도 있었다


참, 오랜만에 넘어졌네 몸이 앞서는 서투른 아이처럼

이전 15화 그, 2월 10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