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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에이치제이 Feb 12. 2022

그, 2월 12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17 파리


꼭 16번의 잠, 파리 6일




+++


아침에 무거운 기분으로 일어났다

공기가 답답하고 정신이 멍하고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유럽의 찬 공기에 생긴 두통과는 다른 붕 뜬 느낌은 

어쩌면 밤새 최고 온도로 설정한 난방이 문제였던 것 같다는 결론


창을 활짝 열어 찬 공기를 들여보낸다

갑작스러운 한기가 느껴졌지만 조금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퉁퉁 부은 얼굴과 무거운 머리와 찌뿌둥한 몸이 바로 괜찮아지는 건 기대할 수 없다





몸 상태를 고려해 실내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라빠예뜨 백화점을 오늘의 첫 번째 일정으로 잡았다


라빠예뜨 백화점 Galeries Lafayette

철골과 유리로 된 아르누보 양식의 돔이 로지아에 둘러싸여 있는 이 웅장한 건축물은

무려 12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유럽 최대 백화점이며 3,500여 개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외부의 유리 통로로 거리를 내려다보며 내부로 들어간다

백화점에 들어가자마자 그 화려함과 웅장함에 놀라 찰나에 통증을 잊었다 그렇지만 이내

기력이 떨어진 몸을 어쩌지 못하고 7층 서점과 쉼터가 있는 곳으로 곧장 올라가야 했다

비상시를 위해 챙겨 온 약을 삼키고 괜찮아지길 바라며 앉아 있다가

책이라도 구경하며 정신을 좀 분산시켜 볼까 했는데 금세 나아질 기미는 없다 결국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아 눈여겨보았던 로베르 두아노(Robert Doisneau, 1912-1994) 사진집을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의 키스 1950년 포함) 사지 못하고 나온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다





하루나 이틀 전 역을 나오자마자 나타난 정면을 보고 스쳐 지났던 오페라하우스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본다 아름다움을 눈으로 삼키는 순간들이 반복되면

그것이 진통제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다





혹은 단 것이 도움이 될까 싶어 가까운 곳에서 발견한 린트 매장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는 입장하는 손님들에게 린도르 초콜릿을 하나씩 나눠주고 있다

약간의 부재료가 첨가된 기본 린트 바 초콜릿 두 개를 사서 나온 후 최선을 다해 걷고 있는 길

최선의 마음이 남은 힘을 끌어올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하루를 몽땅 몽마르뜨르 언덕을 오르려는 게 진짜 계획이었는데

가는 길에 마주한 몽마르뜨르 묘지 Cimetière de Montmartre를 지나며

나아지지 않는 컨디션에 몽마르뜨르 방향의 모든 것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결정한다

스탕달의 묘 하나 겨우 보고 뒤돌아 나오는 무거운 걸음에서

나중을 기약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걸음의 방향을 바꿔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두 번째 왔다

정면과 대성당 내부가 아닌 모든 방향 모든 각도 강 건너에서 바라보이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든 모습을 정성을 들여 차분히 마음에 담아보는 시간

아마 오늘 그러지 못했다면 아주 오래 큰 후회를 품고 지냈으리라 아직도 복원 중인

노트르담 대성당을 떠올리면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그렇게 열심히 커다란 원을 그리며 노트르담 대성당 주위를 돌아보고 나니

어느덧 하늘빛이 달라지고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중간에 숙소로 돌아간다면 다시 나올 수 없을 것 같아 차라리

조금 일찍 귀가하기 위해 여전히 거리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는데

일몰 시간이 다가와 그것만 보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몰 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어 대성당을 등지고 길을 건너

노트르담 주변의 번화한 길을 걷다가 책방 거리를 발견한다 노트르담 대성당 근처

모두가 알만한 중고책 자판이 아닌 큰 매장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는데

살 만한 책을 찾아보느라 정신이 팔렸다가 두 권 사들고 보니 해는 이미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느 때보다 책에 신경이 쏠린 덕분에 통증의 일부도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 





견딜 만해지니 밤의 풍경이 시선에 꽉 차 들어온다

밤의 대성당과 밤의 세느 강 파리의 밤거리를 조금 걷다가 돌아온다

어쩌다 보니 몸을 질질 끌고 다닌 불편한 시간들을 꾹 참고 흘려보내며

잠시 돌아가 휴식을 취한 시간도 없이 오래 길 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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