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에이치제이 Feb 13. 2022

그, 12월 13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18 파리


꼭 17번의 잠, 파리 7일 (+프로뱅)




+++


오직 도시 파리에만 집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라는 핑계로 자주 쓰이는 문장을 비겁하게 떠올리고 만다

그렇지만 아주 멀리 가지는 않는다 나비고 교통패스로도 이동이 가능한 곳

오늘은 파리와 아주 가까운 중세 마을 프로뱅으로 간다


다행히 오늘 아침의 컨디션은 좋다 어제 늦은 저녁부터 회복되기 시작해서

오늘은 맑은 하늘만큼 기분을 다시 끄집어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지친 심신을 힐링시켜 줄

내가 좋아하는 풍경 속으로 간다 그렇다면 몸도 마음도 좋은 기운으로 듬뿍 채워져

남은 파리에서의 시간도 더없이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 동역 Gare De L'est에서 프로뱅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 이 기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으로 들뜬다 프로뱅까지는 1시간 30분이 소요되고 너무 늦지는 않게

그러니까 해가 지기 전에는 파리로 돌아올 예정이다


도착한 파란 하늘 아래 프로뱅의 정겨운 역에서 이미 기분이 좋다

아무래도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풍경을 늘 그리워하는 것 같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 도시 프로뱅 Provins

직전의 도시 안시를 축소해 놓은 듯 마을 한쪽으로 흐르는 물길이 반갑다

기차역으로부터 마을로 진입하기까지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고 길도 복잡할 것이 없으며

곧 익숙한 중세풍의 작은 주택과 상점 건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편안함을 느낀다

아마도 하늘과 나무와 숲을 가리는 도시의 높이와 너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뱅은 역에서 곧 닿게 되는 아랫마을과 세계문화유산의 중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오르막길 위의 성벽과 성벽이 둘러싼 윗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일상의 시간이 흐르는 아래쪽 길들을 천천히 걷는 동안 이미 

저 높은 곳의 풍경을 기대하고 만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일상의 냄새가 풍겨온다

갓 빵을 구운 빵집에서 사람들이 바게뜨를 사 들고 나오고 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나도 가게로 들어가 갓 구운 빵을 사서 나온다


거리의 맛있는 냄새 멋있는 풍경을 즐기며 걷다가

햇빛이 좋은 날 들어간 교회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오전의 빛이 색색으로 부서져 기둥에 알록달록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고 있다



+

경사가 막 시작되려는 길 위에 우뚝 선 또 다른 교회를 발견했다면

바로 그 사이로 난 오르막길을 통해 이제 윗마을로 갈 수 있다

아주 조금 오르막길을 올라 바라보이는 풍경을 보다가 아래쪽의 다른 길들을

모두 둘러본 후에 길을 올라야겠다고 생각하고 방향을 바꿔 내려와

놓쳤을 길과 풍경 사이를 마저 산책한다





이쯤이면 됐다고 스스로 후회가 없을 때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경사가 높아질수록 숨이 가빠올수록 설렘도 가득 차올라 힘들지 않다


오전에 기운차던 바람이 조금씩 잔잔해져서 하늘과 가까워지며 닿은 오르막길의 막다른 곳

동화책 속 작은 난쟁이의 마을 같은 윗마을은 다른 계절인 듯하다

인적이 드물어 꼭 닫힌 아기자기한 상점들은 외부인으로부터 안전을 지키려는 듯

경계를 늦추지 않는 성벽과 닮은 태세를 갖춰 거리는 휑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사람이 들 수 없는 곳에 혼자 발을 들인 기분으로 천천히 이 고요함을 즐기는 지금이 좋다





마음의 중앙을 가로질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에 다다른다

성벽 밖은 어떤 모습일까 호기심이 앞서 성벽을 둘러보기 전에 무작정 성벽 밖으로 나서고 보니

2월에도 넓고 푸른 잔디와 그 너머로도 또 다른 길과 집들이 보인다


성벽 외곽의 푸른 잔디 사이로 난 길을 천천히 걸으며 탁 트인 전경으로부터 오는

시원함을 불어오는 바람이 가져오는 상쾌한 공기와 함께 들이마시다가

 듬성듬성 모습을 나타내는 집과 건물 쪽으로 걸어가 본다


더 기운 내 걸으면 또 다른 길과 풍경이 나오겠지만 너무 멀리 가지는 않고

커다란 반원의 길을 빙 둘러 다시 성벽 쪽으로 돌아온다



+

다시 돌아온 성벽의 계단 위를 올라 내려다보는 풍경들

별다른 것 없이 단순히 파란 하늘과 푸른 풀밭이 보이는 저 풍경 그게 좋아서

화폭에 담은 화가들의 시선과 마음은 언제나 공감이 되고

인생의 어느 지점에는 나도 그런 단조롭고 평온한 직선과 색감으로

그려진 풍경화 속 같은 막힌 것 없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머무르고 싶다


느릿느릿 성벽을 도는 동안 다른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사이 

성이거나 교회로 보이는 저곳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성벽을 내려온다





다시 마을로 들어서서 가장자리로 이어진 길들을 걸어 성벽에서 봤던 것보다

더 크고 멋진 건축물이 있는 장소에 다다른다 문이 닫혀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프로뱅 아래쪽 풍경도 아름답다 


그곳을 끼고 동그랗게 돌아 나와 다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길과 같은 길인지

다른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려가면서 더욱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을 곁눈으로 자주 

흘깃흘깃 엿보다 보니 돌아가야 할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도시를 느끼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건 아쉽지만 느린 걸음으로

바라본 더디 흐르는 도시의 시간과 풍경이 사랑스러웠고 충분한 행복을 느껴

돌아가서도 이 충만한 마음이 오래 이어질 것 같다





파리 동역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다른 시간 속에 입장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이 다른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을 보니 지하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늘빛이 바뀌고 해가 사라질 때까지 동역 주변의 거리를 서성인다 곧 해가 모습을 감추고

조명이 켜질 때 어디까지 걸었는지는 모른 채 눈앞에 나타난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도 (이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조바심이 생긴 것이다)

어디든 가야겠다는 생각이 멈춰지지 않는다 그래서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나가 동네의 밤거리를 걷다가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아

결국 지하철역을 행해 빠른 걸음으로 간다 pm9시가 다 된 이 시각에

귀가를 서두르는 게 아니라 외출을 서두르는 건 이번 여행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밤길을 혼자 걷는 게 무섭지 않아졌다기보다는 아쉬움이 무서움을 이겨낸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 역에서 내려 그 길에서 이어진 세느 강변으로 가는 중이다

역시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고 까만 밤하늘 아래 도시의 조명이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늘 아름다워 그 순간은 언제나 겁이 달아나버린다


강 건너 콩코드 광장의 대관람차가 보이는 세느 강을 따라 걷다 보니

도시의 밤 풍경 사이로 한줄기 빛이 뻗어 나온다

이 시간의 밤이면 정각마다 에펠탑으로부터 쏘아져 나오는 레이저 불빛이

조금 멀리 있는 나를 향해서도 빛을 내고 있다

밤하늘 한쪽에 떠 있는 달도 이 밤 속에 있는 나에게 어둠을 겁낼 필요 없다고

안심하라고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난간에 기대어 다른 건 잠시 잊고

눈앞 세느 강을 품은 도시의 밤 풍경에 오롯이 빠져든다





이전 17화 그, 2월 12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