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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에이치제이 Feb 14. 2022

그, 2월 14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19 파리


꼭 18번의 잠, 파리 8일




+++


merci 감사합니다 

이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날이지 않나 싶다


파리에 있으면서 다른 건 몰라도 뒷사람을 위해 개찰구 문을 잡아주는 건

아주 기본적인 매너에 해당한다 우리도 수동 출입문을 열었을 때 뒷사람 배려 차원으로 

문을 잡아주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처럼


파리의 지하철 개찰구는 자동인 경우보다 수동으로 밀고 드나드는 경우가 많아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매너 좋은 파리지앵들의 배려를 많이 받았고 덕분에 나 또한 

파리에 있는 동안 개찰구 문을 잡아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친절한 그들에게서 유독 더 많은 배려를 받았다 어떤 이는

그 문을 지나기엔 내가 너무 먼 거리에서 걸어가고 있는 중인데도 끝까지 문을 잡아주었고

기계가 문제인지 카드가 문제인지 교통 패스가 인식이 안 돼서 직원과 얘기 중이었는데

내가 잘 지나갈 때까지 수동 개폐구의 문을 잡아두어 준 고마운 도움도 받았다


역시 말보다 앞선 행동은 멋지고 누군가 손수 보이는 본보기는 중요하고 소중하다





가려던 길을 찾지 못하고 반대 방향에서 헤맨 덕분에 독특한 풍경을 본다

계획하지 않은 길에서나 헤매는 길 위에서는 사소한 무엇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그 시간을 허비하지 않은 기분이 들어 괜히 뿌듯하다

+

가려고 했던 곳은 크헤미유 가 Rue Crémieux

파리 12구 겨우 한 블록의 보행자 길에 알록달록 페인팅된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어

이곳은 예쁘고 특별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다

원래 근로자들이 사는 주택이었다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사진으로 본 것 이상일 수 없었던 것은 생각보다 짧은 거리 공사 중인 건물 흐린 날씨 그런저런

이유들 때문이었지만 이 짧은 순간을 발견하기 위해 고생스럽게 다다른 것이 그렇게

실망스럽거나 후회되는 건 아니다 그 덕에 파리의 다른 모습을 또 알게 됐으니까

여행이 긍정적이지 않으면 실패로 기록되는 시간은 결국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걸 이제는

알아서 실수와 후회를 경험과 추억으로 치환할 수 있는 건 나름 영리해진 생각이다



+

크헤미유 가 Rue Crémieux





퐁피두 센터에 갔던 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 수박 겉핥기 식이 되고 말았던 

마레지구 Le Marais에 다시 왔다 

이곳을 제대로 보고 가지 못한다면 파리의 젊고 생동감 넘치는 어느 페이지를 

건너뛰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예전의 내가 그랬고 며칠 전에 내가 그랬으며

그래서 오늘은 마레지구 속 깊숙이 들어와 페이지를 정독한다

+

마레지구에서 피카소 미술관 Musee de Picasso과 더불어 소중하고 아름다운 장소

보주 광장 Place des Vosges 그리고 광장 안의 빅토르 위고의 집 Maison de Victor Hugo

꽤 다니기 좋은 온도 덕분에 보주 광장에서 참 오래 머물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도시에 머물다 보면 유독 마음이 그러길 원하는 장소들이 생긴다



+

보주 광장 Place des Vosges





회색 구름이 걷히고 무채색의 하늘이 컬러풀해지는 오후

햇빛 아래 터벅터벅 걷는 파리의 어느 길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늘 발동이 늦게 걸려서 

비로소 마음을 활짝 열고 진심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정점을 향하여 갈 때에는

이별이 더 가까이 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인 참 한결같이 느린 마음

+

길을 걷다 발견한 것 중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 곳은 우습게도 마트다

매번 다른 곳을 들어가 다양하고 새롭게 시도해보는 먹거리들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휴식 시간이 꽤 즐겁다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은 알만한 서울 매장의 가격과 비교도 안 되는)

1.4유로 정도에 프레지덩 까망베르 치즈를 샀고 치아바타와 살라미도 같이 사서 돌아왔다

쿰쿰한 이 맛과 냄새 샌드위치가 좀 더 업그레이드됐다



+





역을 나오니 내가 좋아하는 해 지는 저녁의 시간과 하늘이다

서두를 건 없어 주위도 둘러보고 하늘도 올려보면서

운하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길을 지나 알지 못하는 광장에 들어선다

어떤 광장은 젊음이다 목적지를 가려다 들어선 이곳은

보드를 타고 춤을 추는 발랄하고 선명한 색깔의 젊음들로 에너지가 넘치고 있다

가야 하는 길에서 멈춰 잠시 아무 데나 앉아 그 에너지로부터 기운을 받는다

+

생 마르탱 운하 Canal Saint-Martin

파리에 위치한 4.5km의 운하로 l’Ourcq 운하와 연결되어 세느 강까지 이어지며 

Bastille역과 République역 아래로 흐르고 있다 이것은 짤막한 정보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지 않을까 그냥 물길을 따라 걷는 동안 매료되고 허우적거리고

그거면 되는 거지 미처 알지 못했다가 이제라도 이곳을 걷고 있는 지금으로 인해

행복하다면 그뿐인 거지 다만 아쉬운 것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운하를 따라 어디까지 가야 할지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그걸 결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 이르러 고민을 해야 했을 때

결국 결정을 끝낸 지점에서 미련 없이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을 때

할 수 있다면 언제고 끝을 만날 그 순간까지 마라톤 완주하듯 끝까지 걷고 싶었지만 말이다



+

생 마르탱 운하 Canal Saint-Martin





버스를 타고 돌아가다가 익숙한 풍경을 발견해 순순히 잘 가던 길에 제동이 걸렸다

밤의 개선문 밤의 대관람차 저 멀리 밤의 에펠탑

자정이 아직 멀리 있는 밤의 샹제리제 거리와 밤의 콩코드 광장에서

미드 나잇 인 파리의 아주 작은 조각을 발견한 기분 재킷 가장 안쪽 주머니에

소중하게 숨겨 넣어 돌아가는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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