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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에이치제이 Feb 15. 2022

그, 2월 15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20 파리


꼭 19번의 잠, 파리 9일




+++


파리에 온 이후로 가장 따뜻하고 햇살 좋은 날 하늘도 티 하나 없이 맑고 파란 날

두 번, 쓸데없이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몽마르뜨르 언덕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계단에서 보이는 예술가들이 살고 있을 

집들의 창과 문이 부럽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내일의 나는 어떤 영감을 기록하거나 그리고 있을까 고민하는 파리지앵으로서의 일상을 상상해 본다


파리 뤽상부르 공원 흐트러진 의자 중 하나를 끌어와 2시간가량을 그냥

널브러지듯 앉아 있으면서 남은 평생 파리의 공원에 앉아 빈둥거리며 살고 싶다는

아주 한심하지만 상상의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이뤄지지 않을 소망을 꿈꿔본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류했던 몽마르뜨르 언덕으로 가는 길

공기가 따뜻하고 다정해서 누군가의 너른 품에 안긴 것 같다

사진만 본다면 봄이라고 해도 믿을 파랗고 푸르른 몽마르뜨르 언덕을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 

가장 먼저 파란 배경 속 순백색으로 빛나는 사크레퀘르 대성당의 말간 얼굴을 만난다 

계단에 앉아 난간에 기대어 이 순간을 즐기는 내 마음과 다르지 않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고 사랑스럽다 공기 속에서 들려와 퍼지는 음악에 맞춰 

사람들의 모든 행복이 다같이 왈츠를 추고 있는 것 같다

+

몽마르뜨르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풍경

아직은 명성과 거리가 있는 숨은 재능들이 캔버스든 다른 어디에든 그려 넣는

찬란한 예술의 세계가 이 아름다운 언덕 어느 한쪽 작은 공간에서 움트고 있다

창조적인 사람들을 흠모한다 그들의 삶 자체보다는 그 삶을 지탱하는 용기와 인내를

미리 고백했지만 몽마르뜨르 언덕 어느 집 어느 방 한 칸에 들어앉아

나도 용기와 인내를 나만의 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러운 마음과 작고 느린 걸음으로 차근차근 담아보는 장면들을 죄다 소유하고 싶은 허망한 욕심은

내리막길 끝에 다다라 버스를 타려는 걸 제지하는 할머니와 과일가게 아주머니 덕에

금세 분실했다 아마도 몽마르뜨르 언덕을 올라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건지

이미 알고 걸어온 길과 방향을 자꾸 손짓으로 가리키셨고 덕분에 나는 다시 언덕을 오른다

+

사실은 다른 길 다른 방향으로 다시 올라 그곳에 좀 더 머무르다가 천천히 내려오려는

그런 마음의 계획이 있긴 했다 금방 재회하게 된 대성당과 사람들과 풍경들

그 속으로 들어가 지금을 실컷 즐기는 나도 누군가의 사진 속에 박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언덕 가장자리로 난 계단으로 내려오며 점점 멀어지는 그 대성당과 사람들과 풍경들을

빠짐없이 꽉 쥐어 본다 손아귀에서 쉽게 빠져나가는 행복을 힘껏 움켜쥐고 놓아주고 싶지 않다



+



+






지나가다가 공원의 입구를 발견하고 들어가려던 날이 있었는데 pm6 close 안내가 되어 있어

(그날만 그랬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 다시 그곳으로 갔다 마침 날씨마저 딱 좋은 날

파리 6구 뤽상부르 공원 Jardin du Luxembourg

오늘은 활짝 열린 문을 지나 공원 입구에서부터 가벼운 걸음을 시작한다 슬슬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 파리의 어느 공원 중에서도 이곳이 벌써 가장 좋아지고 있다

몽마르뜨르에서는 없어서 좋았던 조각구름이 동동 이곳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 된다

크기가 제법 큰 분수의 맑은 물에 드리우는 모든 그림자와 그림자를 흐트러트리며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들 이파리 없이도 멋들어진 나무와 색이 살짝 바랜 초록빛의 잔디

튈르리 정원에서처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철제 의자

그리거나 읽거나 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렇게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공원을 채우고 풍경이 되는 사람들 혹은 고요히 걷거나 다정히 걷고 있는 사람들

2월이 지나가고 계절이 바뀌려고 하는데 곧 이곳은 얼마나 더 아름답게 빛날까

모든 계절 모든 날 모든 순간 이곳에서 널브러져 자유로움을 미친 듯이 만끽하고 싶다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은 그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어 슬프기만 하고

햇빛을 오래 쪼이며 차가움의 띵함과는 다른 띵한 느낌 아니 찡인가 뜨앗인가 띗띳인가

뭐가 뭔가 모르겠는 그런 어질어질한 느낌 속에서 정신도 조금 없다





어김없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 마트도 빠지지 않고 들러 장을 보다가 파리 마트의 양파링이 반가워 한 컷

+

생 미셀 노트르담 역은 어차피 환승하는 역이라 

밖으로 나와 한 번 더 노트르담 대성당과 세느 강을 눈도장 찍는다

봐도 자꾸 보고 싶은 애인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모진 안부를 예견해서였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게을러지지 않고 잠깐이라도 틈 내어 보러 가곤 했던 건 정말 잘한 일 같다



+





저녁이 되면서 다시 구름이 많아지고 있다 낮의 하늘은 정말 선물과도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저녁의 하늘빛은 구름이 있으면 좀 더 근사하긴 하다

+

다시 나섰을 때는 에펠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지만 단순히 에펠탑을 다시 보러 가는 건 아니고

영화 촬영지와 그곳의 밤 속에서도 멋진 에펠탑의 모습을 보러 가는 길이다

그전에 어쩔 수 없이 거쳐가게 되기도 하지만 반드시 거쳤을 에펠탑 바로 아래를 지난다

에펠탑의 정면은 군더더기 없이 반듯하고 황홀하지만 나는 아래에서 아슬아슬 힘들게

올려다보는 에펠탑의 각도가 좋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복잡한 철구조물이

금빛으로 얼기설기 얽혀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그 시각이 좋다

+

다리 아래로 내려가 세느 강을 한껏 가까이 느끼며 강 위를 걷는 듯 길을 걸어 그곳으로 간다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으로 유명한 장소이면서 에펠탑을 조망할 수 있는 또 다른 곳

비르하켐 다리 Pont de Bir-Hakeim

다리 아래로 걸어야 하는 것은 그래야 위로 쭉 뻗은 다리 구조물과 앞으로 쭉 뻗은 직선의 길

영화 속 바로 그 장면이 눈앞에 딱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비르하켐 다리 위로 올라간다 조금 멀어진 에펠탑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인다

그렇게 말은 해도 사실은 앞과 옆과 뒤가 차이가 없는 에펠탑은 이곳에서 봐도

달라지지 않고 에펠탑 인증 사진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다른 풍경과 어우러진 다른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쨌거나 여기서 보는 에펠탑도 다름없이 멋지다

+

다시 다리 아래로 길을 걸어 에펠탑 바로 앞의 알마 다리로 간다 그리고 

가장 정석의 에펠탑의 정면을 올려다보며 견딜만한 밤공기 속에 나만의 뮤직을 추가한 뒤 

다리 건너 딱딱한 시멘트 난간에 기대어

현실에서 도망쳐 나 혼자만 머물 수 있는 세계에 오래 갇혀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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