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2월 16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21 파리

by 윤에이치제이

꼭 20번의 잠, 파리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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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파리의 돌바닥에 고인 빗물을 찰박찰박 밟으며 걷는 기분

웅장한 루브르 박물관에 사방으로 둘러싸여 압도당하는 기분


어느 밤에 미드 나잇 인 파리의 한 조각을 훔쳐 왔다면 오늘은

도저히 훔칠 수 없는 거대하고 검은 파리의 밤 속 가늠이 되지 않는 깊이에

잠식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 이상한 밤이었다





비가 오는 아침에 도착한 베르시 빌라주 Bercy Village

파리 12구에 위치한 이곳은 파리와 인근 지역에 공급할 와인의 저장과 운반을 위한

창고와 철로가 있던 지역으로 지금은 복합 문화공간이 되어 현지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오늘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날씨와 시간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아직은 준비 중인 레스토랑과

한산한 풍경이 아쉽기만 하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곳은 파리에서 그들처럼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찾기 좋은 장소라서 아쉽게도

시간에 쫓기는 나는 비를 피해 파사주 아래에서 아주 잠깐 이곳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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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라빠예뜨 역으로 이동해 역사가 깊은 쇼핑 거리

파리의 파사주 Passages Couverts de Paris로 왔다

파사주는 길 또는 통로라는 뜻으로 지붕이 있고 차가 들어갈 수 없는

파사주 쿠베르 Passage Couvert를 의미하는데 토리노의 아케이드 형식의 쇼핑거리와

유사하지만 직선으로 쭉 뻗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도로와 건물을 잇는 비밀 통로와 같은 느낌이 있어

파리의 파사주는 길치인 내겐 미로에 들어선 것처럼 쉽사리 닿기 힘든 곳이었다


파리에는 현재 2-30여 개의 파사주가 남아 있고 나는 겨우 하나의 파사주를 찾아내고

더 이상 헤매고 다니는 걸 포기했다 지도나 약도에 취약한 나 같은 여행자는 아무래도

여행운에 기대어 이 길 저 길 다니다 우연의 발견으로 뜻밖의 장소에 다다르는 그런

여행을 해야 하나 싶고 그냥 좋아하는 곳을 여러 번 가는 게 맞나 싶은 그런 심정이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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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생 마르탱 운하 Le Canal Saint-Martin

이게 맞다 밤에 닿아 아쉬웠던 장소가 대낮의 햇빛과 하늘 아래에서 어떤 모습일까

설레는 상상을 하며 주저 없이 그곳에 다다르는 것


비가 내린 아침의 하늘이 생각나지 않는 개인 오후의 적당히 푸른 하늘과 적당한 구름의 양

다시 오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마음의 빚처럼 남았을 이곳의 초입에서부터

미흡하고 한심했던 마지막 날 오전의 시간이 모두 보상이 된다


운하의 깨끗하고 맑은 물이 거울처럼 모든 사물을 거꾸로 세워

쌍둥이 피사체를 만들어내는 풍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밤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는데 제대로 보지 못한 생 마르탱 운하의 진짜 모습을 이제야 알 것 같아서

길고 긴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런 불필요한 의문은 집어던지고

길을 잃을 염려도 없이 쭉 이어진 운하의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걷는다


걸을수록 앞으로 가까워지는 풍경과 뒤로 멀어지는 풍경들을 걸음마다 다시

보고 또 보는데도 좋아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이제 이곳은 파리를 떠올리면

깊이 그리워하게 될 내가 사랑하는 장소의 하나가 된다


운하의 길은 아마도 동네가 바뀔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지점이 있었다

시작점에서는 차분하고 고요한 길과 풍경을 보여주던 낭만적인 운하의 구간은

어느 때에는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예술적 풍경으로 바뀌기도 했고

까르르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지켜보는 부모의 사랑 넘치는 눈길이 따뜻한 가족 공원이거나

이곳이 정말 파리가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미래지향적인 계획도시의 휴식공간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 모든 모습들을 품은 다채로운 생 마르탱 운하의 길고 긴 길이 다 마음 깊이 좋았다


그러다가 여기까지면 충분하지 싶은 마음으로 다다른 뺑땅 지역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디까지 왔는 줄도 모르다가 정말 멀리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이곳이 파리의 교외지역이기도 하고 확 달리진 길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때

로마에서 잘못 간 버스의 종점 어느 동네에서 생긴 두려운 마음이 이곳에서

다시 생겨났다 그건 그냥 내 느낌이었을 뿐인데 그 느낌이 지배해버린 나의

감정 상태는 이미 돌려놓을 수 없었고 괜한 두려움일 수 있는데도 그 감정에 속박된 나는

빨리 그곳을 떠나 익숙한 파리의 길 위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정말 나의 느낌일 뿐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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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쥬 역으로 왔을 때 다시 파리 여행자에 걸맞은 심박수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부적절한 직감이었을 수도 있고 겁이 날 만했던 확실한 이유도 없다


몽쥬의 익숙한 마트에서

와인과 스테이크와 당근 라페 (벌써 세 번째 사고 있다) 빵 햄 치즈도 빠뜨리지 않고 산다

장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와인이라고

다르지 않을 줄 알면서도 사둔 건 파리에서의 저녁 식사도 마지막이라서 괜히 그런 것이다


해가 지려는 시각이었으므로 환승역인 생 미셀 노트르담 역에서 역시 또 밖으로 나왔다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지만 그래서 붉은 노을빛이 구름에 번지며

세느 강의 하늘은 파스텔 빛의 또 다른 예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먹은 음식에 배가 부르고 마신 와인에 취한다

한 잔째 이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침대 위에 일찍부터

널브러질 수는 없다 몸에 적당한 열기를 품고 늦은 시각에도 방을 나선다

그래야 하는 날이다 한 번 남은 잠을 벌써 시도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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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미셀 노트르담 역으로 다시 왔다

까만 밤하늘 아래에서 빛나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세느 강 쪽 길을 따라 걸으며

바라본다 그 자리에 늘 있는 건 대성당이고 떠나는 건 내 쪽이다 나는 저 모습 그대로

다시 건재한 노트르담 대성당을 언젠가는 꼭 보고 싶다 그때 돌아오는 것도 내 쪽이다

그러니까 그 모습으로 다시 우뚝 서 있기를


뒤돌아서 걷는 파리의 밤 돌길 위에 아직 고여 있는 빗물 그 위로

밤의 불빛들이 유령처럼 흔들리며 어려있고 그걸 밟는 내 발자국이 괜히 슬퍼 보인다

비 온 뒤의 유럽 돌바닥에 고인 빗물을 찰박찰박 밟는 즐거움이 언제나 좋았었는데


억지웃음을 지으며 세느 강을 따라 걸어 퐁네프 다리로 간다

수많은 사랑의 약속들은 모두 이루어졌을까 이뤄지지 않은 약속들은

무슨 수로 풀려날 수 있을까 애초부터 서로를 옥죄는 결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채우고

영원을 바라는 게 틀린 건 아니었을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맹세보다는 나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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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과 다른 입구로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서는데 자정에 가까운 시간

사방으로 길게 둘러진 거대한 건물들의 공간 그 한가운데 섰을 때 뭔지 모를 웅장하고

기묘한 기운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무엇도 움직이는 것 없고 모든 게 그 자리에 있는데 나를 향해 덤벼 오는 듯한 어떤 아우라에

짓눌리는 기분 아니 이것도 아니다 정말 설명하지 못하겠다

카메라 배터리는 방전됐고 겨우 핸드폰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며 남긴 사진에서조차도

또렷하지 않은 화질의 평범한 스틸 컷 장면이 전부일 뿐인 도무지 불가능한 미션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봐야 소용없는 걸 알아서 나는 그 기운을 그냥

오롯이 느끼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 계속 사방을 빙글빙글 돌며

나의 감정이 잔잔해질 때까지 얼이 빠진 채로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멍한 채로 비워진 마음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삼각뿔들을 대면했을 때 그 투명함에 또 한 번

깨끗해지고 있었다 밤의 루브르에서는 왠지 모르게 로마의 대성당에서 원치 않아도

받게 되는 축복으로 정화되곤 했던 느낌처럼 복잡하고 어두웠던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이상

질척이지 않고 뒤돌아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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