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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에이치제이 Feb 10. 2022

그, 2월 10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15 파리


꼭 14번의 잠, 파리 4일




+++


지도 없이 다녀서 좋은 점과 지도 없이 다녀서 나쁜 점

두 가지가 적당히 지분을 나눠 가진 파리의 넷째 날

지금의 여행하는 방식이 전자라면 예전의 여행하는 방식은 후자였다

어떤 게 더 나은 여행의 방법이냐를 따지는 건 쓸데없다

그저 나에게 좋은 방식대로 그 시간들을 즐기면 그뿐

지금은 지금의 여행 방식이 좋다





오페라 역에 하차해 꿉꿉한 지하를 빠져나오자마자 화려한 건물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페라 하우스의 정식 명칭은 Academie Nationale de Musique

파리는 지하와 지상의 갭이 커서 때때로 험한 지하로가 멋진 세계로 이동하는 통로 같다 


걸어서 곧 방돔 광장 Place Vendôme에 도착한다

파리의 광장 중에서도 여러 의미에서 화려하기로는 이곳을 따라갈 곳이 없지 싶다

고전 예술 양식의 8각 모양의 광장은 건축과 공간의 미학적 화려함 뿐만 아니라

부호들이 밀집해 있던 명성의 화려함까지 여전한 것 같다


이미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도 특별할 유명 브랜드 매장들 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라뒤레 매장 쇼윈도 안쪽의 알록달록한 마카롱

예쁜 보석과 장신구보다 마카롱이 좋은 욕심 없어진 내가 천만다행이다





파리의 아름다운 튈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으로 걸음이 이어진다

화사한 봄도 청량한 여름도 무드 있는 가을도 지난 겨울의 정원은 나무들마저 좀 야위었지만

어느 계절이어도 그 계절만의 분위기를 가진 튈르리 정원이 좋다

무엇보다 규칙도 배열도 없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는 의자들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장 좋다 그렇지만

파리의 겨울 날씨에 익숙해진 이들처럼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오늘은 못하겠다 오늘과 내일은 파리에 머무는 날들 중 가장 기온이 낮고 

흐리고 습하기까지 한 날씨 예보로 연이어져 있어서 사는 게 아닌 머무는 사람은

이 공기를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겠다


정원의 호수를 빙 둘러 걷다 보니 다른 쪽 출입구로 나가면 펼쳐질 

콩코드 광장의 대관람차가 보인다 개인적으로 파리의 대관람차 중 가장 멋진 정면을 가진





대관람차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벨리스크가 정중앙에 자리 잡는

뜻밖의 멋진 구도를 바라보며 콩코드 광장으로 향한다 멀리 에펠탑이 보이는 것은

높은 건물 없이 탁 트인 광장이 먼 풍경까지도 고스란히 품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관람차와 오벨리스크와 분수의 삼박자의 아름다움을 껴안은

콩코드 광장  Place de la Concorde

하늘을 찌르는 멋진 오벨리스크 양 옆으로 대칭을 이루는

강의 분수 Fontaine des Fleuves와 바다의 분수 Fontaine des Mers


광장의 다른 쪽 멀리 앵발리드의 황금 돔 끝이 바라보인다

양팔을 동그랗게 모아 품에 안은 것 같은 방돔 광장과 달리 콩코드 광장은

모든 걸 다 품을 각오로 두 팔을 힘껏 벌리고 있는 것 같다





샹제리제 Champs-Élysées 쭉 뻗은 직선의 대로 끝으로 개선문이 보인다 

직선의 시각적 효과 때문에 조금만 가면 곧 가닿을 것 같은 거리 그런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버스에 올라타고 보니 버스는 어느새 4 정거장 째 지나고 있다

따뜻한 날씨였다면 샹제리제를 쉬엄쉬엄 구경하면서 걸었어도 괜찮았을 테지만

개선문을 향해 직진하는 동안 이 날씨에 이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


에뚜알 개선문 Arc de triomphe de l'Étoile

개선문 바로 지척에서 하차한 후에 거대한 개선문 아래에 선다

새겨진 글도 조각도 뜻을 모르는데 개선문의 그 위엄 아래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 건

한 사람의 위대한 업적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기리기 위해 쏟아부은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 놀라운 성과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구경하고 싶었던 상점 몇 군데에 들른 후 샹제리제를 지나며 더 이상

추위를 견디지 못해 잠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는데 환승을 하려는 역이

오르셰 미술관 역이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환승은 잊고 곧장 역 밖으로 나간다

오르세 미술관이 계획했던 일정은 아니었지만 그냥 지나쳐지지도 않아서

몸과 마음의 즉흥적인 결정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낸 후 길을 걸어 나와

세느 강을 만난다 세느 강 너머로 콩코드 광장의 대관람차가 보인다 그렇다면

다리 건너에 튈르리 정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변에 보이는 루브르 박물관까지


지금은 걷다 보니 이 장소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을 막 알게 됐고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 보니 세느 강 양쪽으로 방돔 광장 튈르리 정원 콩코드 광장

오르세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이런 주요 장소들이 가까운 구역에 모여 있는 걸 알았다

지도를 미리 봤다면 더 계획적으로 다닐 수 있었을까 그래도

지도 없이 마구 다니다가 이렇게 경험으로 깨우치게 되는 나의 약도가 좋다

지도를 다시 꺼내 들지 않아도 내 머릿속 몸속으로 체득한 길은 잘 잊히지 않으니까

아무렇게나 걸어야 얻어지는 우연한 발견은 짜릿한 쾌감을 안겨 주기도 하니까



+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

세느 강변의 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



+

이번엔 정말 나의 따뜻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왔는데

미술관 박물관 밀집지역의 지하철역은 그마저 예술적인 볼거리가 있다

파리 지하도를 새로이 기억하게 될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될 줄 기대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요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숙소 근처 대형 슈퍼마켓에서

냉동 피자를 사봤다 냉동 제품을 잘 먹지 않는데 (한식 요리는 무궁무진하니까)

이곳은 레스토랑을 가지 않는다면 내가 해 먹을 수 있는 요리가 파스타나 샐러드 외에는

거의 전무해서 냉동식품을 곧잘 사게 된다

(치즈를 워낙 좋아해서) 트리플 치즈 피자를 사서 데워 먹었는데 맛이

꽤 괜찮다 그렇지만 두 번 사 먹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피자보다는

첫날 먹었던 파이(빵)가 떠올라 그걸 하나 더 사러 가야겠다





센 강 쪽에서 본 바깥의 루브르 박물관 일부를 보기만 하고 돌아온 것은

오늘 밤의 일정이 루브르 박물관이었기 때문이다

해가 지면 한 곳만 공략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있어서 오직 루브르 박물관을 가기 위해

다시 지하철을 탄다 그런데 전 정거장에서 잘못 내렸다 괜찮다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 건 꽤 낭만적인 일이니까


눈에 익은 황금빛 조명의 건물 하나가 보인다면 루브르 박물관이

인접한 것이다 길을 건너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입구가 여러 개인데

내가 들어간 쪽은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와 이어져 있는 뒤쪽이거나 옆쪽이다


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

아빠의 수많은 파리 엽서에서는 물론이고 내가 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삼각뿔이 있는 곳으로 서두르지 않고 걸어간다 자진해서 더디 걷는 것은

극적으로 등장하는 그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인데 그 순간이 더 더뎌진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루브르 박물관 어느 방향에서 봐도 모든 건물들 사이로 멋지게

걸리는 보름달이 짙은 저녁 하늘에 동그랗게 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푸른 밤을 빠르게 흐르는 구름이 달을 지나 늑대인간이 등장할 것 같은 스산하고

찌릿한 느낌이 들어 영화 트와일라잇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묘한 밤 속에서 오래 서성이다가 결국 사랑스러운 삼각뿔을 만났다


노을이 걸린 어제의 에펠탑과 보름달이 걸린 오늘의 루브르 박물관이라니

마지막 도시에서까지 난 운이 좋은 여행자다


요상한 밤의 박물관을 방향 없이 후회 없이 실컷 다니다가

절대 미학의 삼각뿔 아래로 들어간다 기하학적 무늬의 이 아름다운 삼각뿔

깨질 듯 결코 깨지지 않을 단단한 투명함 

아래로 내리 꽂힌 뾰족한 뿔이 마치 폐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상처받은 것조차 감당할 수 있는 심정이 되어 그 앞을 오래 떠나지 못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의 어린아이일 적 순수한 마음이 고작 엽서로 목격했던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순간은 몇 번이어도 벅차올라서 오늘 밤

쉬이 잠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보름달이 뜬 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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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 삼각뿔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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