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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에이치제이 Feb 08. 2022

그, 2월 8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13 파리


꼭 12번의 잠, 파리 2일





+++


마지막 도시에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여행이 시작될 때는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파리에 와 있다

도착한 날과 떠나는 날을 제외하면 9일 동안 머물 파리에서의 첫날이다


예전에 파리에 5박 6일 일정으로 여행 왔을 때

내 취향의 외곽 도시였던 오베르 쉬즈 우아즈를 이틀에 걸쳐 다녀오느라

파리의 필수 코스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꼭 가보고 싶었던 

몽마르뜨르 언덕조차 오르지 못하고 다음 도시로 이동해야 했었다 또

그때는 파리의 비위생인 환경에 매우 실망을 했었고 아름다운 에펠탑에 그 흔한 감동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예술과 자유로 대변되는 도시의 어떤 면은 눈살이 찌푸려졌었다

아마도 내 안에 내재된 원칙이나 규칙이 깊이 지배하는 성향이

자유와 방임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부정적인 어떤 측면은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그래서 이전의 파리는 거의 기억에 남은 게 없다 인상 깊지 못했던 과거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게 다가오겠지 나도 변했고 도시도 변했을 테니까





도착한 도시에서의 첫 잠이 성공적이었다면 나머지 날들에 대해서도

괜히 예감이 좋은 법이다 창 밖 하늘도 좋은 예감에 한몫하는 아침이다


낮이 길지 않은 계절이라 서두를 법도 한데 한껏 게으름을 부린다

일주일이 넘게 남은 날짜가 주는 여유 때문인가 그렇지만

이번에는 파리 외곽 어디에도 욕심내지 않고 이 도시에 온전히 집중할 생각이다


오늘 하루는 우선 필요한 것을 사서 쟁여두는 날로 계획한다

10박의 기간 동안 내게 온전히 배정된 방을 필요한 것들로 조금 채워두고 싶다





몽쥬 약국으로 간다 사다 줄 것과 당장 쓸 것을 구입하기 위해서다

아시아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약국 화장품을 경제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곳

굳이 매상을 올려줄 관광객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선물용으로 사야 할 게 있고

똑 떨어진 기본 화장품을 사야 하는데 순하고 조금이라도 무해한 제품이 필요하기도 했다


아예 역 이름에 Monge가 있는 7호선으로 약국에 도착했다

지하철은 예전 기억과 다르지 않게 차가운 이 계절에도 특유의 지릿한 냄새가 있다

파리에 온 것인가 냄새가 도시를 기억하게 하는 것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마들렌 냄새가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을

떠올린다 역 앞에 작은 마켓이 열려있어 스치듯 구경한 후 곧장 약국으로 간다

이른 시간인데 꽤 큰 약국 내부가 벌써 북적거린다 여행 내내 잘 보이지 않던

한국인들이 이곳에 무척 많이 있다 얼른 필요한 것만 사서 나온다 





어떤 특정한 목적지 없이 길 위를 그냥 쭉 걷는다 7호선 몽쥬 역 인근

파리의 풍경을 그냥 보는 것이다 필수 관광코스만 다니는 것보다 언제나 이 편이 좋다


걷다가 까르푸가 나와 필요한 장을 본다 요리를 할 수 있으니

며칠 머물 동안 필요한 것들을 여러 가지 구입한다 일상을 사는 것을 조금

흉내 내보는 것이다 그러기엔 짧은 기간이지만

분쇄 원두커피 (커피머신이 있어서) 커피 필터 과자와 사탕 빵과 잼 토마토소스, 그리고

리옹에서 호스트였던 그녀가 첫날 내게 권했던 계란과 햄이 든 빵이 있어서 (맛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하나 구입했다 냉동 즉석조리 제품이었다 (전자레인지가 있으니까)


짐을 두고 나오려고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이래서 나비고(교통패스)가 매우 유용하고 편하다 파리 여행에는 필수

RER 5호선 7호선을 타고 왔다가 다시 RER선을 타러 왔더니 RER 선에 

에펠탑을 갈 수 있는 역이 있어 아직 예정하지 않은 에펠탑이 눈앞의 풍경 안에 들어온다

파리에서 다른 각도의 다른 풍경과 어우러진 에펠탑을 목격할 수 있는 곳들이 있는데

이렇게 우연히 보게 되니 더 좋았던 에펠탑, 그렇지만 나중을 기약한다





아주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파리가 큰 도시인만큼 지하철 노선도 많고 복잡해 늘 신중하게 체크해야 하는데

서울 지하철의 급행과 비슷한 개념까지는 예측하지 못해서

숙소가 있는 역으로 가는 방향의 플랫폼으로 맞게 내려왔음에도

내려야 할 역에 서지 않고 바로 종점까지 가버리는 열차를 타버리고 말았다

분명 1 정거장이 남았었는데 정거장 사이가 너무 길고 풍경이 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후로


반대쪽에서 (직행이 아닌) 열차를 타면 되겠거니 했는데 탄 열차가 또 반대쪽의 급행이라

내려야 할 역 1 정거장 전인 그 역에 섰다 - 그래서 내리자마자 바로 등을 돌린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탔는데 그 플랫폼은 직행 아닌 같은 방향의 전체 역에 모두 서는 열차 라인이었던 것

그래서 내려야 할 역으로부터 더 멀어졌다 -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가는 방향을 잘 확인해

열차를 탔다 그런데 또 정거장 사이가 길다 처음 잘못 간 종점까지 또 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 다시 반대쪽 열차를 탔다 그런데 또 급행을 타서 내려야 할 역 1 정거장 전인 역에 3번째 서 있다


2시간이 지나 있었다 안시로 다시 가도 되는 시간이다

아무리 아무리 이럴 수가 있나 1 정거장을 남겨 두고 그 1 정거장을 가지 못하고 있다니 

이렇게 자괴감이 든 채로 이 역에 서 있다니

앞으로도 자주 지나치거나 내리게 될 이 역은 파리 도서관 역이었다

Bibliothèque 이 글자 하나로 기억했던


정말 신중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드디어 제대로 지하철을 타고

딱 1 정거장을 지나 제대로 역에 내렸다 한 숨 돌린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몸이 피곤한 것보다 얼이 빠져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못 차리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나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배고픔을 느낀다

사 온 것들을 정리하고 간단하게 냉동빵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커피도 내린다

빵 이름은 상자에 적혀 있었을 텐데 모르겠다 두 번째 먹어도 맛있다는 사실 외에는





원래 계획은 해가 지기 전에 에펠탑으로 가서 파리 야경의 대표적인

밤의 에펠탑을 첫 번째로서 기념비적으로 보고 담을 생각이었는데

아예 나가지 않으려니 시간이 아깝고 그곳을 가자니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적당히 타협한 게 동네 마실이었다 로마에 도착해서도 의례적인 수순처럼

일상의 삶에서의 습관처럼 첫날의 첫 밤 동네를 산책했던 그때처럼 말이다


동네는 편의에 초점을 둔 여느 주거지역처럼 오래되고 역사적인

건물보다는 세련되고 편리하고 개성 있는 현대적인 건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게 싫지 않았다 사람 사는 도시의 여느 풍경과 다르지 않은 친근함

진짜 동네 마실 나온 기분이었으니까 그중 독특한 건축물 하나 발견한 게 특별한

수확이라면 수확이었고 슬슬 걸었다 돌아온 길 위에서의 시간이 그래도 

이 귀한 날들 중의 하루를 아주 허투루 허비한 것은 아닐 거라는 위로가 되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고 헤매고 버려진 것 같은 시간도 결국 여행이니까

그런 경험조차 추억이 될 것이니까 오늘의 시행착오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


+


참, 숙소로 돌아와서 씻고 정리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갑자기 비상벨이 울렸다

타국 타도시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건가 그런데 막상 벨이 울리니 정말

침착해지진 않고 조금 당황하게 되더라 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봤지만 비상문도 닫혀있고

너무 조용했다 큰일은 아니겠지 생각했지만 로비에 내려가 보았다 리셉션에 사람이 없었다

로비에 아이를 안고 앉아 있는 이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고 했다

로비 역시 조용한 걸 보니 정말 아무 일 아니었나 보다

로비에 있는 차를 한 잔 마시며 그래도 상황을 좀 보려고 소파에 앉아 있는데

리셉션에 직원이 돌아와서 다가가 사이렌이 왜 울렸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걱정할 일이 전혀 없다며 농담처럼 서프라이즈라고 말했다

한국 호텔 리셉션에서 직원이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하면 항의를 받았을 것이다

프랑스 호텔 리셉션에서 그네들 특유의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 것에 정색을 하면

도리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제스처만 돌아왔을 것이다 세상 쿨한 척하니까

뭐 별일이 아니었으면 됐다 직원이 여러 가지 차를 종류대로 꺼내 권한다

진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나름대로의 전달 방식이겠지

그 이후로 체크아웃까지 별일 없었으니 됐고


첫날부터 별별 경험을 했다 그래도 기운 빠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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