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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에이치제이 Feb 06. 2022

그, 2월 6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11 안시


꼭 10번의 잠, 안시 3일




+++


집주인이 키우는 고양이가 있다 여행 중에 느꼈지만 여기 고양이들은

도도하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고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며 엉기는 개냥이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알러지가 있어서 반려동물을 안거나 아주 가까이하지는 못하는데

(가르쳐 준 냥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아이가 내 발을 감으며

자꾸만 같이 놀아달라고 한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이 귀여운 아이를 안겨주려는

그녀에게 알러지가 있다고 말했는데 지금 고양이와 즐겁게 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거짓말이라도 한 줄 알겠다 싶다 그렇지만 배를 까고 애교를 부리기까지 하는데

어떻게 무신경 무관심으로 지나쳐버릴 수 있나 이 아이는 정말 사람을 좋아하나 보다 

신뢰 넘치는 집사도 아닌 나에게조차 이렇게 할 수 있는 모든 애교를 부리는 걸 보면





창 밖을 보니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나섰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서두르지 않고

차 한잔을 마시며 몸과 마음을 편하게 풀어주는 고요한 시간을 가진다

교차로와 가까이 있는 집이지만 작은 정원이 있고 창이 난 쪽이

도로는 아니라서 창가에 앉아 멍하니 있는 시간이 꽤 괜찮다





안시의 구도심을 그냥 걸어도 좋지만 쭉 이어져 있는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건물 아래 아치형 길을 통과하며 다닐 때의 독특한 분위기와 재미가 즐겁다

거기에 수로 가장자리 물길 가까이로 걷는 좁고 투박한 길은 운치도 스릴도 있고

호수와 강과는 다른 찰랑거리는 맑은 물이 오래되고 낡은 것들과 만들어내는

안시다운 아름다움은 자꾸만 봐도 사랑스럽다



+




이른 아침에 빵을 사러 나갔는데 가게가 오픈하지 않아 산책만 하고 돌아왔었다

그래서 오전의 걷기를 마치고 잠시 쉬러 돌아오는 길에 다시 빵가게에 들러

바게트를 사고 마트에도 들러 장을 본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안이 아주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건지 어쩌면 낮잠을 즐기고 있는 건지


언제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주방에서 샌드위치를 만든다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도 한 잔 마신다

 여행하는 동안 각종 유럽식 소시지와 치즈를 무척 많이 사 먹고

(나는 식사 대용으로 그냥 치즈만 뜯어먹기도 할 정도로 치즈를 좋아한다)

유럽 어디에서나 보이는 다양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흉내 내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오늘 어려울 것 없이 뚝딱 만든 샌드위치가 가장 성공적이고 맛있다

프랑스 바게트의 맛이 기본 이상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천천히 식사하는 시간이 충분한 쉼이 되어

다시 거리로 나설 기운이 난다





어제 지나쳤던 교회는 평일의 오늘은 텅 비어 있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이는

나 혼자 뿐이다 바로 그런 순간이 좋아 오늘 다시 찾은 교회에서

나는 아주 긴 시간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내가 늘 황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파이프 오르간을 사진으로 담고 있을 때

(연주자가 연습을 위해 대기 중이었는지) 느닷없이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누누이 얘기해 왔던 나의 여행운이 여기 안시에까지 미친 것이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과 비교한다면 거대한 규모는 아닌 여기 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며

홀로인 이방인을 위해 연주되는 파이브 오르간의 깊고 웅장한 울림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간다 해도 알 수 없는 위대한 손길로부터 은총을 받은 이의 눈에서

저절로 눈물 한 방울 또르르 흐를 것 같은 순간이었다


10여분 가량이 지나 (연주 소리를 듣고 들어온 건지) 다른 두 명의 커플 관광객이

교회로 들어와 마음의 소리로 감탄 중인 나와 달리 그들의 언어와 소리로 감탄사와 문장들을

쏟아냈을 때 잠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 후 2-3분 정도 머물던 그들이 먼저

예배당을 떠나가고서도 파이프 오르간 연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이방인의 운명은 영원한 시간과 양립할 수 없기에 

나는 보이지 않는 연주자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가벼운 목례를 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그곳을 조용히 나왔다





다시 현재의 시간을 걷는다 사실 비현실의 (중세의) 시간을 걷고 있는 기분이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돌길과 끊임없이 흐르는 물길과 끊임없이 나타나는 아름다움

이 모든 게 삶과 맞닿아 있을 텐데 그들에겐 그저 일상일 텐데

나에겐 생소하고 신비로운 공간과 풍경 속에 머무는 이 시간들이

현실의 삶과 일상을 송두리째 잊은 채 꿈을 꾸는 것만 같다





현실과 꿈 사이 그 극명한 차이가 극에 달했을 때는 바로

익숙해지고 있는 길과 건물 사이에서 별안간 알프스의 한 자락이 튀어나왔을 때였다

뭘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의 뒷배경이 되어 저 자리에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길을 걷다 보면 다시 일상의 장면에서 사라지고 눈앞의 풍경은

일상으로 꽉 찼다가 길을 걷다 보면 다시 비현실처럼 일상의 사이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놀라움의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가 가장 비현실적인 호수 앞에 다다른다

하루를 건너뛴 탓인지 여전히 놀라운 풍광에 여전히 기가 찬다

그래서 놀라움이 진정되고 이곳이 그저 나의 일상 인양 익숙해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호수를 바라보며 보낸다


호수를 끼고 있는 공원은 규모가 꽤 크고 

많은 사람이 마음껏 이곳을 즐기기에도 충분해서 아마도 

안시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곳을 찾을텐데 

안시에 잠깐 머무는 사람도 예외는 없어 호수를 구석구석 걷는 시간이

아주 즐겁다 걸을 때마다 바뀌는 풍경을 즐기다가 벤치가 나오면 앉아 쉬기도 하고

호수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면서 아낌없이 보내는 호수에서의 시간

나중에 이 시간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 그 때문에 안시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는

집주인의 얘기가 그래서 꽤나 공감이 가고 그들의 결심과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해가 기우는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희거나 회색빛의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도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잠시 구도심 거리로 걸어 나왔다가 해지는 저녁을 호수에서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호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오늘의 저녁은 안시에서의 마지막 저녁이고

조금 슬픈 현실에 대한 최고의 결론은 이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충분치 않지만 최선을 다해 도시를 껴안았으므로 큰 후회는 없다

오히려 걷기만 했을 뿐인데 많은 것을 보여준 이 도시에서의 경험이

아주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벌써 이별하려는 건 아니다 잠깐의 시간만 

허락될지도 모르지만 작별 인사는 내일 아침의 산책길에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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