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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에이치제이 Feb 09. 2022

그, 2월 9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14 파리


꼭 13번의 잠, 파리 3일




+++


am4 : 27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다

어젯밤 산책을 다녀오고 나서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조금 안 좋았다

사진 정리라던가 일기를 쓰는 늘 하는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고 일찍 누웠었는데

여러 번 깨고 밤새도록 뒤척였다 그러다가 잠을 포기하고 새벽부터 이러고 있다

일하면서 3일 밤도 너끈히 새웠었는데 잠 좀 못 잤다고 아무것도 못하진 않을 것이다





외출 시간 am8:30 새벽에 하루를 시작했더니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되어버렸다

이른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 인양 출입하지도 못하는 소르본 대학으로 간다

Université Paris-Sorbonne 건물 자체로도 파리를 대표하는 곳 

대학교를 자꾸 찾아다니는 것은 아직도 대학이나 캠퍼스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 시절 생각에 설레서인가 싶다 지나고 떠올리는 그때는 늘 좋았고 늘 아쉽고 늘 그립다


대학교 건물을 본 후에는 대학가라 불리는 길을 걷는다

대학가 풍경이라고 하면 기대하는 바가 있고 캠퍼스와 더불어 길로부터 떠올리게 되는

추억이 있다 그 추억을 떠올리기 힘들었던 별 것 없었던 로마의 대학가에 이어

좀 더 기대한 파리의 대학가는 썩 괜찮았지만 역시 나의 추억을 연관 짓기에는

시절의 풍경도 시절의 추억도 결이 확연히 다르다

그래도 이곳은 소르본 역의 파리 풍경인 그것으로도 좋다 길이라면 충분히


 



소르본 대학에서 가까워 일정으로 묶어 계획했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왔다 이 이름은 

자판을 누르고 글자를 생성시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다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오니 생각보다 더 빨리 현실이 지난 시간을 지배해버려

여행의 기억이 삶에 잠식당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재 소식을 접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에 의해 어렵게 이루어낸

아름다운 걸작이 인간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것 그게 너무 손쉽다는 것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아직 슬픈 역사가 기록되기 전의 그때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가까워지고 점점 거대해진다 턱 밑까지 와서야 비로소

순간이 현실로 자각이 되어 경이로운 마음이 거대하게 차오른다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오래 줄을 서서 드디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약한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촛불과 

화려하고 영롱한 스테인드글라스로부터 갖가지 색으로 부서져 들어오는 빛과

그곳을 찾는 모든 이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듯 가는 순간마다 들려오는 파이프 오르간의 울림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득 채우는 빛과 음의 축복이 가슴에 울렁임이 되어 물결친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부터의 세느 강을 따라 걸어 퐁네프 Pont Neuf에 다다랐다

첫 방문도 아닌 나에게 파리는 왜 이렇게 생소할까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았을까

파리에서 놓쳐버렸던 것들 놓치지 않고도 소멸되어버린 기억들

나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처음처럼 낯설다


무심함이라는 것이 그렇다 사람에게든 장소에서든 진정 마음으로 

대하지 않은 것들은 사라진 기억이 되어 내게 남지 않는다 그게 사람이라면 상처가 될 수 있는 것

내가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안면인식 장애까지는 아니어도)

어쩌면 결국 그 대상에게서 내 마음과 시선이 결여되었었기 때문은 아닐까

주의 깊었다면 기억이 저 깊이 어디에서라도 살아남았겠지 그러다 그 기억을 건드리는 

사소한 촉매제 같은 어떤 것 하나로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시늉이라도 했겠지

퐁네프 앞에서 갑작스럽고 별스럽게 반성의 시간이 된다


최근에 그 영화를 다시 봤었다 퐁네프의 연인들

이 아름다운 영화에서마저 나는 파리의 지릿한 냄새를 떠올렸다

그 안에서 진짜 발견해야 할 사랑이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실제로 본 퐁네프는 아름다웠지만 파리의 현실과 사랑이 담긴 영화에서는

사랑보다 현실을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나는 파리의 첫인상을 못나게 받아들였던 나에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나 보다 나는 아름다운 단면만 보고 싶은 사람인가 보다





버스를 타고 내 공간으로 돌아온다 파리에서는 도저히 혼자서 외식을 못하겠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기온이 낮지 않은데도 추위가 제법 느껴지는 파리를 걷다가

언제라도 숙소로 돌아올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이유를 잘 모르겠다


돌아와 점심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다 두 시간 정도는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걸 먹으며 체온과 체력을 올려두는 게 좋은 패턴 같아서 파리에 머무는 동안

이것은 이 도시를 돌아보는 방식으로서의 나만의 루틴이 된다

 




다시 길로 나섰을 때 어제 가지 못하고 보류한 에펠탑이 목적지가 된다

아무렇게나 찍어도 흔히 보는 엽서의 사진처럼 근사한 장면을 연출하는 에펠탑


에펠탑 아래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매 순간마다 달라지는 에펠탑의

변화무쌍한 순간들을 담는다 이 딱딱한 철구조물 재질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들을

보여주는지 목에 담이 올 때까지 고개를 들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

본인도 모르게 보여주고 마는 바보 같은 모습 그건 나만 들킨 모습은 아닐 것이다



+

에펠탑 아래를 지나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점점 멀어지는 에펠탑이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또 다른 엽서 사진을 만들어내는 모습들을 뒷걸음질치며 바라본다


주요 관광지를 인증하듯 찍고 다니는 것은 정말 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렇게 정성 들여 아름다움을 탐닉하지 않으면 마음에 머물지 않는다

휙휙 스쳐 지나가며 찍은 사진과 진심으로 눈여겨보다 찍은 사진도

나중에 다시 보면 떠오르는 무엇이 다르다 전자는 기억과 감정이 또렷하지 않다

그걸 진즉에 알았다면 많은 것을 탐하기보다 소중한 한 가지를 오래 품었을 것이다



+

다리를 건너 (퐁디나 Pont d' Iéna)

평화의 벽을 지나 에펠탑을 바라보는 것을 잠시 멈춤

그건 조금 기다리기 위해서다 해가 질 즈음에 또다시 멋진 모습을 보여줄

에펠탑의 변신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샛길로 빠져 걷는 동안 다다른 곳은 앵발리드 Invalides 이곳은

돔 교회의 지하 묘소에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관이 놓여 있고

군사적 업적을 가진 위인들을 위한 묘지 예배당 군사박물관 등의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멀리서부터 위대한 업적을 세상에 공표하듯 황금빛 돔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도로를 가로지르고도 멀리서 

파란 하늘을 찌르는 돔의 위용이 대단하다


광활한 하늘과 공간 사이에 우뚝한 앵발리드를 여러 번 돌아보다가 다시

일상의 길을 걷다 보니 건물 한쪽에서 해가 이울고 있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다른 시간에 다시 만난 에펠탑은 이제 저녁 하늘에서 까만 나뭇가지와 형제처럼 혹은

솜씨 좋게 파란 천 위에 촘촘히 뜬 검은 뜨개실처럼 여리여리하다


이 시간에 에펠탑으로 돌아온 건 정말 최고의 결정이었다

에펠탑 주위로 떨어지는 저녁 해가 정교한 뜨개와 어우러져 명장의 명작이 되었다

더 이상의 표현이 무색할 뿐 해가 떨어지고 노을빛이 흩어질 때까지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동경하거나 짝사랑하는 이의 조바심 나는 발걸음처럼 에펠탑 주위를

뱅글뱅글 돈다 사랑해서 애타는 마음을 표현할 순간은 언제나 순식간이라 초조해한다





천천히 에펠탑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멀어지는 것은

트로카데로 정원 Jardins du Trocadéro 샤이요 궁 Palais de Chaillot 그곳에서

다시 사랑의 눈빛을 보내기 위해서다 짝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길을 건너는 동안의 해 질 녘 하늘이 봄색처럼 물들며

마음을 살랑살랑 간지럽히다가 다리를 건너는 동안 어두워지는 하늘에 번져

서서히 옅어지다 사라진다 색이 사라진 자리에는 동그랗다가 만 달이 뜬다


멀어지고 작아질수록 수많은 도시의 불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에펠탑 어둠이 깊어지면 완전히 모습을 바꿀

에펠탑을 기다리는데 가슴이 콩닥콩닥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마구 쿵쿵대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를 누구도 모르지 않아서 나의 이런

지나친 설렘과 기대가 과잉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리라



+

완전한 밤이 오기 전 어느 즈음에 레이저 불빛 한 줄기가 

에펠탑 가장 꼭대기에서 쏘아져 나온다 이제 더 깊은 어둠이 드리우면 에펠탑은

그만이 치장할 수 있는 반짝이는 빛의 옷을 입고 또 한 번 화려하게 모습을 바꿀 것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바로 그 황금빛 갑옷을 입고


오늘, 할 만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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